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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4)

파리외방전교회 소식지에 김대건 신부 자필 서명이 그대로 실리다

 

 

복자 김대건 신부의 자필 서명이 실린 「아날」 내지. 편의상 자필 서명지가 옆으로 실렸다. 위의 것은 복자 샤스탕 신부의 것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파리외방전교회는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프랑스 교구 소속 신부들로 이루어진 선교회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파견 선교사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시기마다 다양한 잡지를 발행했는데 이는 선교 경비 마련은 물론 성소자 모집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실제로 1870년에 1036명이었던 선교사 숫자는 1910년에는 3046명까지 늘어났으며 매년 50여 명씩 떠나는 선교사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파리외방전교회 잡지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시작한 잡지는 1841년에 발간된 「콩드 랑뒤」(Comptes Rendus)이다. 각 선교지의 교세를 정리한 선교사들의 ‘연례 보고서’ 모음이라고 볼 수 있다. 각 지역의 보고서 형식(신자 수, 성인 영세자 수, 외교인 자녀 영세자 수 등 표기)은 대동소이하여 앞쪽에는 각 선교지의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교세 일람표를 두었으며 책의 뒤쪽에는 그해 사망한 선교사의 약전을 실었다.

 

「콩드 랑뒤」의 경우 처음에는 석판에 글씨를 새겨서 찍어내다가 1871년부터는 성 쉘피스 성당 근처에 있는 빅터 구피(Victor Goupy)사에서 활자로 인쇄하기 시작했다. 1658년에 간행하기 시작한 「tat de la Socit des Missions trangres」(파리외방전교회 보고서)는 1994년까지 간행되었으며, 「Œuvre des Partants」(선교사 보고서)은 1885년에 시작하여 1897년까지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 발행되었다.

 

복자 김대건 신부의 자필 서명지 사본.

 

 

이번에 소개할 자료인 「Annales de la Socit des Missions trangres et de l’Œuvre des Partants」(외방전교회와 파견 선교 연보)은 1898년 2월호부터 간행을 시작하여 1940년까지 발행되었다. 「Bulletin de la Socit des MEP」(파리외방전교회 회보)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위해 선교지 관련 문서와 편지를 엮은 것이다. 홍콩 나자렛 인쇄소에서 간행되었으며 첫 번째 볼륨은 1922~1941년까지 두 번째 볼륨은 1948~1961년까지 발행되었다.

 

그 밖에 「chos de la Rue du Bac」(파리외방전교회 소식)도 두 볼륨으로 나누어 발행되었는데 첫 볼륨은 1921~1967년, 두 번째 볼륨은 1967~1992년에 간행되었다. 이후 「chos Missionnaires」(선교사 소식, 1942~1947년), 「Missionnaires d’Asie」(아시아의 선교사, 1948~1960년), 「Missions trangres de Paris」(파리외방전교회, 1961~1967년) 등의 잡지들도 제목과 체제 등을 바꾸면서 이어져 왔다. 이 잡지들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주요 선교지 가운데 한 곳인 한국 천주교회의 소식과 함께 김대건 신부에 대한 내용이 다수 실려 있다.

 

 

김대건 신부의 자필 서명 실려 있는 「Annales de la Socit des Missions-trangres et de l‘OEuvre des Partants」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후원회원들을 위해 선교지의 생생하고 흥미로운 소식을 엮은 일명 「아날(Annales)」의 1925년 제166호에는 김대건 신부의 자필 서명이 실려 있다.

“무익하고 부당한 종, 그리스도를 위하여 묶인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 1846년 음력 6월 8일(inut. ind. servus Andreas Miss. AP. Cor. Pro. Christo vinctus 1846 Lunae 6ae die 8a).”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기 전 감옥에서 쓴 19번째 편지. 현재 남아 있는 김대건 신부의 편지 가운데 유일하게 한지에 붓으로 적었다.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이 자필 서명은 김대건 신부의 19번째 편지의 마지막 서명 부분을 옮겨 실은 것이다. 19번째 편지는 김대건 신부가 감옥에서 베르뇌, 매스트르, 리브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것으로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들에게 한 장의 편지를 보내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곳의 환경과 공경하올 신부님들에 대한 생각과 애정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로 시작한다. 특히 최양업 신부에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자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는 바로 그 편지이다. 편지를 쓴 음력 6월 8일은 양력으로 7월 30일이니 그가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48일 전이다.

 

김대건 신부의 탄생 100주년과 곧 있을 시복 소식 전하는 「Bulletins de la Socit des Missions-trangres」

「뷜탱(Bulletins)」은 파리외방전교회가 홍콩 나자렛 인쇄소에서 발행하던 월간 잡지로 선교지 관련 문서와 편지들이 주로 실렸다. 창간 첫해인 1922년 10월호에는 한국 본토인 신부 양성의 역사를 소개하며 김대건 신부 약전과 그의 탄생 100주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특히 본토인 신부 양성의 성공적인 사례로 김대건 신부뿐만 아니라 최양업 신부도 소개했다.

 

최양업 신부가 라틴어로 쓴 ‘친필 서약서’ 사본. 원본은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있으며 고 최승룡 신부가 발견했다.

 

 

“바로 작년 한국 교회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했으며 곧 그가 시복되는 더 좋은 소식이 있을 예정이다. 페레올 주교는 그의 죽음을 알리고 그를 추모하며 아들과 다름없는 그를 잃은 것은 개인적으로도 너무나 잔혹하고 교회에는 큰 손실이라고 했다. 그는 사제직에 오른 처음이자 유일한 조선인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의 신심과 업적을 칭찬했다.”

 

사본이지만 한국교회사연구소는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서약서’를 소장하고 있다. 두 신부 모두 공통으로 클레멘스 11세 교황의 칙서 「엑스 일라 디에」(Ex illa die)에 따라 조상 제사와 같은 전통 의례를 실행하지 않을 것이며 교우들이 이를 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적었으며 맨 마지막에 “나 자신이 손수 서명했습니다”라고 자필 서명을 했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30일에 상해에서 선서문을 작성했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 호’를 타고 상해에서 출발하기 바로 전날(8월 31일) 쓴 것이다. 신부의 자필 서명 아래는 “벨리노 명의 주교이자 조선대목구장 조제프”라는 페레올 주교의 서명이 있다.

 

최양업 신부의 서약서는 1849년 6월 21일에 적었는데 “중국 교우들을 영신적으로 지도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으며 베르뇌 주교의 확인 서명과 주교 인장이 찍혀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31일, 송란희(가밀라,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