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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2)

 

 20세기 초 프랑스 교회 주간지에 김대건 신부의 순교 장면 삽화 실려

 

 

「르 펠르항」 제2519호 표지.

 

 

「Le Plerin」(르 펠르항)의 제호는 ‘순례자’라는 뜻으로 프랑스 3대 가톨릭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바야르 프레스(Bayard Press)에서 1872년 창간했다. 창간 당시에는 뉴스레터 형식이었으나 1877년에 기사와 삽화를 게재하는 주간지로 체제를 바꿔 발행하기 시작했다. 주간지의 크기는 가로 18.3cm, 세로 25.5cm이다. 「Le Plerin」은 교회 소식 외에도 조선에 대한 다양한 소식을 원색 삽화와 함께 실었다.

19세기에 발행된 삽화 중심의 신문이나 잡지는 독자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시각적 자극과 환상을 주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경향은 1839년 최초의 사진이 만들어지고, 1844년 카메라가 상용화되어 아시아를 여행한 서양인들이 직접 촬영한 사진들로 대체되기 전까지 글을 읽지 못하는 일반 대중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Le Plerin」은 흥미로운 삽화 때문에 근현대 역사를 주제로 다루는 전시에 자주 활용되고 있다. 당시 해외에서 출판된 자료들은 연도나 날짜, 호칭 등에 다소 오류가 있는데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편집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독자들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본토인 첫 순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이야기를 읽으며 선교지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르 펠르항」 1528호 1906년 4월 5일 자. 김대건 신부의 순교 장면을 묘사한 삽화가 크게 그려져 있다. 이돈수(가밀로) 소장.

 

Le Plerin 제1528호(1906년 4월 15일 자)

김대건 신부의 순교 60주년을 기념하는 해인 1906년 4월 15일에 발행된 「Le Plerin」에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 장면을 묘사한 삽화와 함께 그의 일대기가 실려 있다. 삽화 아래는 “가경자 김대건 신부 첫 한국인 사제 순교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참수, 순교자의 머리는 칼을 8번 내리치고 나서야 떨어졌다”라는 다소 긴 설명이 달려 있다.

삽화의 처형장 모습이나 처형에 참여한 등장인물을 볼 때 조선인이라 보기 어렵다. 아마 삽화가가 아시아 각 나라의 전통 복장이나 생김새를 구분하지 못해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을 섞어 그렸을 것이다. 실제로 1968년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때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내건 한국인 순교 복자화를 그린 이탈리아 화가는 한국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순교 복자를 일본인처럼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참수를 앞둔 순교자 김대건 신부의 자세는 압도적이며 하늘을 향한 그의 눈빛은 형형하다.

「Le Plerin」은 김대건 신부를 총 4면(21~24쪽)에 걸쳐 소개하면서 ‘순교자 집안’, ‘조선으로 입국’, ‘갑자기 뱃사람이 된 첫 한국인 신부’, ‘체포’, ‘처형’ 등 5개의 소제목을 두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했다. 그리고 기사의 마지막에는 1846~1847년 전교회 연보(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에 실린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편지를 인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순교자 집안 : 김대건은 1821년 8월 한국의 충청도 지방에서 태어났다. 왕족 혈통인 그의 가족은 천주교 순교자를 여러 명 배출하는 영광을 가졌다.…모방 신부는 1836년에 김대건을 다른 두 한국인 젊은이들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신학생 김대건의 발전은 그의 덕성만큼이나 학문에서도 빨랐다. 그는 곧 3개 외국어를 구사했는데 중국어는 원어민만큼, 라틴어는 수월하게, 그리고 프랑스어는 곧잘 했다. 아편전쟁 끝 무렵(1842)에 영국(프랑스의 오기)의 세실 장군은 청나라와 조선과 이야기할 때 그를 통역으로 고용했다. 조선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는 ‘통역가로 일하는 동안 그의 사고가 성장하고 용기가 생겼다. 차츰 그의 영혼은 대담해졌고 주님께서 그의 앞날에 주신 뜻을 이루도록 인도하셨다. 이후의 위험한 원정들은 그를 두렵게 하기는커녕 더 큰 용기를 가져다주었다’고 기록했다.”

“갑자기 뱃사람이 된 첫 한국인 신부 : 서울에서 김대건은 자신의 입국을 철저히 비밀로 하기 위해 심지어 그의 어머니에게까지 귀국을 알리지 않았다. 9년 만에 만났을 것인데도! 그는 비밀리에 120피아스터(piastres)에 배를 하나 샀는데 고틀랑 신부가 말하길 그것은 그저 쇳덩어리(목선의 오기)로,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 만든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 화창한 날, 그는 가장 신실한 교우들을 불러 그들에게 어디로 가는지 언질도 없이 배에 태웠다. 급조된 선장인 그는 마찬가지로 급조된 선원들과 함께 망망대해로 떠났다. 조잡한 나침반 하나로 중국을 향해 전혀 모르는 바다를 항해했다. 김대건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제작한 성모 상본을 지니고 왔다. 용감한 항해사들은 모두 순교자의 가족이었기에 하느님의 가호를 믿었다.”

“체포 : 김대건의 원정은 거의 다 성공했지만, 동료들의 파렴치한 배반으로 체포되었다. 순교자가 직접 쓴 참수되기 전까지 견뎌낸 고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페레올 주교에게 자신의 체포 상황을 이야기하고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포졸들이 사납게 제게로 달려들어 제 머리채를 잡아 쥐어뜯더니, 밧줄로 저를 묶고 세차게 발길질하고, 주먹질하고, 막대기로 때렸습니다. 이후 그들은 제 옷가지를 벗기고 다시 나를 조롱하며 묶고 때리더니 저를 재판관 앞에 끌고 갔습니다. 그 관리가 제게 말하길, ‘당신은 그리스도교인인가?’ 제가 그에게 답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르 펠르항」 제2519호 7월 5일 자. 순교 장면 삽화에 무릎 꿇고 있는 김대건 신부 뒤로 지켜보는 대신들과 태극기가 살짝 보인다.

 

Le Plerin 제2519호(1925년 7월 5일 자)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79위의 시복식 당일인 1925년 7월 5일 자 「Le Plerin」에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 장면을 그린 흑백 삽화가 실렸다(3면). 삽화 속에서 희광이는 큰 칼을 들고 서 있고 두 손을 모아 십자가를 든 김대건 신부가 무릎을 꿇고 있다. 참수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왕과 대신들 뒤로 반쯤 보이는 태극기가 눈길을 끈다.

‘한국의 순교자들’이라는 제목 아래 김대건 신부를 소개했다. “불과 1784년에서야 시작된 한국 교회의 역사는 하나의 긴 순교록이라 하겠다. 7월 5일에 이들 순교자 중 세 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성직자와 한 명의 한국인 사제가 시복될 것이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그리고 ‘김’이 바로 그들이다. 한국인 사제 안드레아 김은 앵베르 주교의 뒤를 이은 페레올 주교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메스트르 신부의 입국을 준비하다가 1845년(1846년의 오기)에 체포되었다.

그의 위대한 영혼과 지혜는 정부 대신들조차 매료시켰다. 그들은 왕에게 김대건 신부를 죽이지 말도록 청했으나 집행할 준비가 된 왕은 버텼다. 형벌이 준비되는 동안 안드레아는 자신의 사형 집행자들과 대화하며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겁니다’라고 말하고 ‘편안하게 마음껏 치시오. 나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젊은 신부의 머리는 땅 위로 뒹굴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17일, 송란희(가밀라,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