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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1)

 

“젊은 조선의 첫 사제는 한분이신 하느님 위해 목숨을 바쳤다”

 

 

네덜란드어로 인쇄된 교황청 전교기구 베드로 사도회 소식지. 1922년 4호, 이돈수 가밀로 소장.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6년 9월 2일 편지로 김대건 신부의 ‘체포 소식’을, 11월 3일 편지로 그의 ‘순교 소식’을 전했다. 이후 김대건 신부에 대한 소식은 유럽 전역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이야기와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사와 순교사는 신문과 잡지는 물론 당시 출판된 여러 단행본의 매력적인 소재가 되었다. 세계인들에게 한국인 첫 사제이며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는 어떻게 소개되었을까.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19세기에는 새로운 선교회들이 많이 창설되었다. 특히 1817년 교황청 포교성성의 기능과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근대 선교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선교회들이 복구되거나 새롭게 생겨났다. 이러한 선교회들의 활동을 돕기 위한 정책과 예산을 후원하기 위한 단체들도 잇따라 설립되었는데, 교황청 전교회, 교황청 어린이 전교회, 교황청 베드로 사도회, 교황청 전교 연맹 등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교회의 사명인 선교에 헌신하고 선교를 증진시키기 위해, 즉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 설립된 여러 선교회에 선교지의 현지인 사제의 탄생과 죽음은 극적인 사건이었다. 더욱이 사제 없이 평신도들이 서학을 공부하여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젊은이가 자신의 동료와 함께 신자 공동체를 결성하고 성사의 은총을 완성하기 위해 북경 주교에게 또 교황에게 사제를 보내달라고 청하는 편지를 수차례 썼다는 한국 교회의 역사는 여러 나라의 선교 소식지에 흥미롭게 등장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성 김대건 신부 희년을 맞아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를 제목으로 총 5회에 걸쳐 세계인에게 소개된 김대건 신부 관련 자료를 연재한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 송란희 선생의 특별 기고이다.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 여러 유럽 언어로 출판된 이들 자료는 신문, 잡지, 리플릿, 소책자 등 형식도 다양하다.

1922년 베드로 사도회 소식지 표지 장식

“누구도 성소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모토 아래 각 선교 지역의 현지인 사제 양성을 후원하는 교황청 전교기구 베드로 사도회의 네덜란드 지부에서 발행한 선교 소식지이다. 1922년 11월 발행된 4호에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가 표지로 실렸으며, 2면에 걸쳐 김대건 신부의 일생과 순교 장면이 소개되었다. 표지는 우석 장발(루도비코, 1901~2001)이 1920년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기낭 교장 신부의 은경축 기념 선물로 그린 초상화로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 아래에는 “가경자 김 안드레아 1845년 8월 17일에 사제품을 받은 한국의 첫 현지인 신부로, 1846년 9월 16일에 신앙을 위해 순교했다”는 사진 설명이 달려 있다.

1921년 5월에 창간된 이 소식지는 중철 제본의 소책자 형태로 앞뒤 표지를 제외하고 총 16쪽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10.3cm, 세로 22.9cm이다. 유가지로 판매가는 20센트이며, 베드로 사도회에 가입된 회원의 가정에는 무료로 제공되었다. 당시 발행인인 얀 슈미트(Mgr. Dr. Jan Olav Smit, 1883~1972) 주교는 파라루스(Paralus)의 명의 주교이자 노르웨이와 스핏츠버겐(Spitzbergen)의 교구장이었다.

교황청 베드로 사도회는 네덜란드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20년 포교성성 장관 반 로숨(Van Rossum, 1854~1932) 추기경이 얀 슈미트 주교를 교황청 베드로 사도회의 네덜란드 지부장으로 임명하면서 크게 성장하게 된다. 이후 얀 슈미트 주교는 네덜란드 선교 사업의 중심인물로, 교황청과 일치를 이루며 네덜란드의 선교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소책자의 주요 내용은 네덜란드 각 교구에서 모은 후원금이 전 세계 현지인 신학교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소식 전달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아프리카, 인도,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 베트남의 통킹, 말라카 해협의 폴로 피낭, 중국 동몽골과 귀주, 일본 삿포로와 나가사키 등에 있는 신학교를 지원하고 있었다. 한국 교회 소개에서는 원산의 덕원 신학교 신학생 3명을 후원하고 있으며 그들이 김대건 신부의 뒤를 이어 진정한 사제가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도 담았다.

 

교황청 전교기구 베드로 사도회의 네덜란드 지부 선교 소식지 4호의 10~13쪽.소식지는 당시 네덜란드 각 교구에서 모은 후원금이 전 세계 현지인 신학교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그 가운데 2개 면에 걸쳐 김대건 신부의 일생과 순교를 자세히 담았다.

 

몇 번의 고문 끝에 여덞 번 칼 맞고 순교

김대건 신부에 대한 소개는 “한국은 100년 전에 이미 사제 순교자를 배출한 나라이며 그 장본인은 가경자 김 안드레아로, 한 젊은 한국인 신자가 그린 그의 초상화가 본 팸플릿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제 양성을 위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가 1831년(1836년의 오기)에 선택한 3명의 젊은 한국인 중에는 1821년생인 김 안드레아도 있었다. 그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중국으로 보내졌고 1842년까지 마카오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해 중국과 유럽 사이에 소위 아편전쟁이 발발해 프랑스가 두 척의 군함을 보냈다. 그중 한 척은 조선과의 무역 관계를 시작할 의도를 가졌고, 그 선장은 신학교장에게 통역관을 주선해 주라고 부탁했다.… 위험한 여정 끝에 김 안드레아는 1845년 8월 17일 한국인 최초로 사제 품을 받는다. 8일 후 그는 주교와 다른 선교사와 함께 다시 뱃길을 나선다. 또 한 번의 위험천만한 여정 끝에 세 선교사는 조선에 도착해 아주 조용히 그들의 임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다시 안드레아 신부는 [조선] 밖으로 보내지는데, 이번에는 중국과 동료 선교사들과의 연락을 시작하라는 임무였다.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천주교 신자로 발각된다.

그는 투옥되어 외국인들에게 협조한 죄로 고문당하지만, 심문관들에게 천주교 신앙에 대해 설득하였다. 판관은 황제(왕의 오기)에게 그의 면죄부를 청하지만 프랑스 해군으로부터 실종된 선교사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면 보복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협박 편지를 받는다. 이것은 끝을 불러온다. 놀란 황제는 김 신부를 참수형에 처할 것을 명령한다. 몇 번의 고문 끝에, 젊은 조선의 첫 사제는 8번 칼을 맞고 1846년 9월 16일에 한 분이시며 참되신 하느님과 하나이며 참된 교회를 위해 그의 목숨을 바쳤다.

한국 원산에 있는 신학교에는 네덜란드가 후원하는 세 명의 신학생이 있다. 이 대목구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프랑스인 선교사들 외에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 수도회의 독일인 선교사들만 활동 중이다. 가경자 김 안드레아를 본받아 우리의 세 학생이 그들 고국의 진정한 사도가 될 수 있기 바란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10일, 송란희(가밀라,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사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