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한인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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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가톨릭 교회 교리서 (4)
 
 
5. 계시(啓示)

자연적 이성을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업적으로부터 확실하게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또 다른 인식의 질서, 곧 신적 계시의 질서가 존재한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히 자유로운 결정으로, 당신을 계시하시고 내어 주신다(가톨릭교회교리서 50항).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자연 세계와 인간의 내면을 살펴봄으로써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는 “어떤 분”, 즉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하느님의 존재는 알 수 있어도, 하느님의 속성은 알 수 없습니다”.

강 건너편에 집이 있습니다(우리에게는 강을 건너갈 수단이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그 집의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창문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입니다. 미루어 짐작컨데 그 집안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음(존재)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성격이 어떤지(속성)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커튼이 걷혔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주인공을 생생히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이 강을 건너와 우리 집 안에 들어와서 함께 대화를 나눕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열어서 보여 주시는 것을 계시(啓示)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revelation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우리와 하느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베일을 걷어내서 보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전능하시다, 공정하시다, 삼위일체이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 눈으로 직접 보거나, 우리의 느낌이나 생각으로 알 수 있을까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수준 차이는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을 직접 보고 느끼고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심을 압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속마음, 본모습을 열어 보여주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하느님의 계시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는가에 관해서는 다음 주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계시함으로써, 인간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서서 당신께 응답하고, 당신을 깨닫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신다(가톨릭교리서 52항).

하느님은 왜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 주시는 것일까요? 호감이 가는 사람과는 대화를 하고 싶고, 그에게 속마음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그와 함께 삶을 나누고 싶습니다. 반면에 싫은 사람에게는 이름 조차도 알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내면을 인간에게 계시를 통해 알려 주시는 이유는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은 결국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6. 수양 종교와 계시 종교

다른 종교들과 비교할 때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리스도교는 계시 종교”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자기 힘만으로는 알 수 없고, 하느님께서 계시를 통해 알려 주셔야만 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반면에 불교나 힌두교, 유교, 도교와 같은 종교들은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인간이 욕심을 버리고 깊은 명상을 거듭하게 되면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종교들을 수양 종교라고 부릅니다.

수양 종교들은 인류의 위대한 유산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는 수양 종교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합니다. 조용한 산사(山寺)에서 면벽 수행을 하는 스님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식음을 전폐하고 일체의 사념을 끊어버린 채 명상에 전념하는 모습은 용맹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볼 때, 수양 종교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수양을 거듭한다고 할 지라도 하느님께 다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본성상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친구처럼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핵심이고, 이 믿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계시로써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2항).

[2012년 11월 11일 연중 제32주일 의정부주보 4-6면, 강신모 신부(선교사목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