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한인 천주교회


로그인

조회 수 5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하느님을 찾아야 행복한 인간

 

 

교리공부의 중요성

왜 신앙교리를 공부해야 하느냐고요? 먼저 신앙과 지식은 서로 상호관계에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즉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이 더 깊어 갈수록 그분께 대한 우리의 신앙도 더 깊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이 깊어 갈수록 그분께 대한 지식도 더 깊어 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교회의 교리를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우리의 지식적인 측면에서 끝날 일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더욱더 심화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신앙 체험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체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지식적인 면에서 하느님께 대하여 아는 인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알면 알수록 그만큼 더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께 대하여 알면 알수록 그분께 대한 우리의 신앙도 더 깊어간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교리의 어원과 교회의 소명

‘교리’(敎理)라는 말은 라틴어로 ‘카테키스무스(Catechismus)’ 라고 하는데, 그 어원을 보면 ‘메아리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리란 나자렛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전해 주신 소식, 곧 복음을 메아리치게 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구원의 소식을 세상에 이렇게 메아리치게 하는 것, 곧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외치는 것, 그것이 교리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인간, 계시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인격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즉 우리 인간은 이성의 타고난 빛을 통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보면서 ‘그것을 만드신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곧 ‘인간을 넘어서는 하느님이 참으로 계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갓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은 어떠어떠한 분이시다’ 라는 식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이 세상만물은 어떻게 있는 것인가?’를 인간이 자신의 이성으로 생각해 봤을 때,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런 식의 무한소급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처음의 원인은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으니), 그런 원인이 되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정도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느님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하느님으로부터의 계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입장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 인간에게 스스로 드러내시는 것이 계시인데, 이 계시의 빛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느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는데,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처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과 악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이며,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대화할 수 있는 파트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까닭

우리 신앙은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를 창조하셨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으로부터 영광이나 감사와 같은 그 무엇을 받으시길 원하셨기에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오직 사랑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쳐나는 사랑으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수많은 생물 가운데 유독 인간에게만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리하여 우리 인간을 하느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대화의 파트너로 삼으신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원래의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겠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인 것이고, 또한 바로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하느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복된 삶

인간에게 가장 복된 삶이란 하느님의 뜻대로 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러한 삶은 그 자체로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모자라서 우리가 그 영광에 무엇을 더 보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그러한 삶이 참으로 완전하신 하느님께 영광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 인간이지만,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아니었던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시고 당신의 은혜로 돌보시니,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이고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삶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갈망과 하느님의 이끄심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마음 속 깊이 하느님을 찾는 열망이 숨어져 있습니다. 인간 안에 그렇게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 새겨져 있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원래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늘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려고 하는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을 넘어서 저 세상을 바라는 그런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창조된 우리 인간이기에, 우리 인간은 또한 그 하느님을 향해서 창조된 존재인 것이며,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창조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또 창조하신대로 버려두시지 않고 계속해서 이끄신다는 것은 우리 신앙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인간을 끊임없이 돌보시는 분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갈망들까지도 손수 이끌어 주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안에 있는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에 대한 갈망’, ‘행복에 대한 갈망’, 이러한 것들을 친히 이끌어주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그러한 갈망들을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입니다.

늘 기쁘게 하느님을 찾아나가고, 그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서 행복한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시기를 소망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1월호, 글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동성당 주임, CBCK 교리교육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