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한인 천주교회


로그인

2004.08.02 18:11

강론: 연중17-18주일

조회 수 229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연중 제 17주일

제 1독서: 창세 18,20-33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 오는 저 아우성을 나는 차마 들을
수가 없다. 내려가서 그 하는 짓들이 모두 나에게 들려 오는 저 아우성과 정말 같은 것인지
알아보아야 하겠다." 그 사람들은 걸음을 옮겨 소돔 쪽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냥
야훼 앞에 서 있었다.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물었다. "당신께서는 죄 없는 사람을 죄인과 함
께 쓸어버리시렵니까? 저 도시 안에 죄 없는 사람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 곳을 쓸어
버리시렵니까? 죄 없는 사람 오십 명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죄 없는 사람
을 어찌 죄인과 똑같이 보시고 함께 죽이시려고 하십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공
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소돔성에 죄 없는 사람이 오십 명만 있으면,
그 죄 없는 사람을 보아서라도 다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다시 말했다. "티
끌이나 재만도 못한 주제에 감히 아룁니다. 죄 없는 사람 오십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때문에 온 성을 멸하시겠습니까?"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저 곳에 죄 없는 사람이
사십 오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이 "사십 명밖에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
까?" 하고 다시 여쭙자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사십 명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 아브
라함이 또 여쭈었다.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삼십 명밖에 안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가 "삼십 명만 되어도 멸하지 않겠다." 하고 대답하시자 그
가 또다시 여쭈었다. "죄송하오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이십 명밖에 안 된다면 어
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가 "이십 명만 되어도 그들을 보아서 멸하지 않겠다." 하고 대답하
셨다. 아브라함이 다시 "주여, 노여워 마십시오.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열 사람
밖에 안 되어도 되겠습니까?"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
다. 야훼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 고장으로 되돌
아갔다.

1. 주석과 묵상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이야기의 맥락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간의 눈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약속을 하시는데 그 '약속'이 오늘
우리 대목의 핵심 단어이다.
하느님께서 장차 보여주실 땅을 축복 속에 약속하시고(창세 12,1-3), 이미 늙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에게 하느님께서 직접 자손이 땅의 티끌만큼(13,16), 하늘의 별만큼(15,1-21)
불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18,1-15). 아브라함은 그 하느님을 축복을 내리시는 분, 계약의
파트너로 체험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함께 역사를 엮어나가시고, 아브라함은 하느님
과 함께 역사를 체험한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약속에 충실하시기에, "야훼께
못할 짓만 하는 아주 못된 (소돔) 사람들"(13,13)에 대한 심판까지도 그에게 알려주신다. "내
가 장차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18,18) "하느님은 소돔에 일어날 엄청난
사건을 아브라함이 외부인처럼 인지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느님은 신뢰의 관계에서 부
른 아브라함에게 이를 알리고자 하시는데, 이는 인간에게 감추어 있는 역사의 저 밖에서 하
느님의 행위가 나타나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브라함은 소돔에서 일어나게 될 일을
이해해야 한다!"(폰 라드) 이리하여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 오는 저 아우성을 나는 차마 들을 수가 없다. 내려가서 그 하는 짓들이 모두 나에게
들려 오는 저 아우성과 정말 같은 것인지 알아보아야 하겠다."(20절)
우리말로 '아우성'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불이익을 당하는 이들이 법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소리이다(폰 라드). 긴급한 상황에서 들려오는 약자의 소리를 들은 사람은 법적으로 그들을
도울 의무를 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귀에까지 가 닿은 그 아우성은 우리가 보통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도덕적으로 지은 죄악의 소리만이 아니라 법적으로 소외당한 이들이
도움을 청하는 호소이기도하다. 야훼 하느님께서 "내려가서 알아보아야겠다" 라고 하신다면,
지금 그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의 대화를 통해 곧 드
러나지만 그렇게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하느님의 귀에까지 들려갔는데도 저 도시를 멸해야
겠다고 하신다면, 도와달라고 외치는 약자들까지 쓸어버리겠다는 말이 아닌가? 무엇을 의미
하는가? 도움을 청하는 그들 역시 그 도시의 죄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다. 즉, 그들도 역시 서로 도울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만 도움 받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적
이고 이기적이고 탐욕에 찬 못돼먹은 사람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소돔이
멸해야 한다면 저 도시가 이방인의 도시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자기 중심적인 못된 인간
의 마음과 행동 때문일 것이다.
소돔 사람의 죄(20절)의 본질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야훼계 전승에 의하면 소
돔의 죄는 동성애(19,4 이하)이다(동성애 = 소도미: 남색, 수간 獸姦). 이사야에 따르면 사회
정의의 결핍(1,9이하)이다. 에제키엘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이다(16,46-51).
'아우성'의 성격으로 볼 때 소외된 자나 약자에 대한 연대성의 부족, 자기 중심적인 삶도 죄
이다.
오늘 제 1독서의 출발점은 죄 없는 사람들도 그들 죄인들과 함께 멸망해야 하는가 하는 아
브라함의 걱정이다. 아브라함의 걱정은 하느님과의 논쟁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소돔의 멸망
을 막아볼까 하는 데에 있지 않고,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의 공정성을 들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느님 앞에 냉철하게 고소하는 것이다. 고소하기 위해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가
까이 "다가선다"(23절). 다가선다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의 공정성을 확신
하기 때문이다. 다가서는 데에서 아브라함의 애탄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하느님의 은혜를 믿
고 기대는 그 배짱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더욱 하느님께 다가서게 하고, 결국은 하느님은
공정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
하느님께 제시하는 죄 없는 사람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데서 이 대목의 긴장은 고조된다.
하느님의 거부는 어떻게 해서라도 인간을 쓸어버리겠다는 하느님의 분노의 표시가 아니라,
다만 몇 명의 의로운 자만 있어도 그를 구원하겠다는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
해야 할 것이다. 예레미아서에서는 열 명이 아니라 "바르게 살며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하
나라도 있으면 나는 예루살렘을 용서하리라"(예레 5,1)고 한다. 그런데 소돔의 사람들은 늙
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못돼 먹었다. 그런 그들에게 야훼의 천사는 멸망을 선언한
다(19,1-13, 특히 13). 몇 명의 죄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티끌이나 재만도 못
한 주제"로까지 자신을 낮추는 아브라함의 애 타는 마음에서 그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읽
을 수 있다.
소돔이 이방인의 도시라는 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스라엘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민족
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모든 사람의 구
원을 가능하게 한 예수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2. 강론 주제

가) 오늘의 소돔
소돔은 과거의 도시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소돔은 많다. 반드시 성의 문란을 대변
하는 홍등가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소돔의 상황에 살고
있다. 물질 만능 시대에 더한 이기심과 욕심으로 남이야 어떻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식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 무장되어 한, 그렇게 나만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한, 우리는 소돔
에서 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식은 편중되고,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사회 정의는 짓
밟히고, 종교는 광신이나 맹신의 집단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불평과 불만이 고조되고, 불
신이 만연한 가운데, 서로 아우성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말을 하는가? 세상이 왜 이런가, 망하게 생겨먹었다,
차라리 망해버려라, 하면서 모든 잘못과 책임을 남에게 미루며 세상을 저주하는지는 않는
가? 하느님께서 내려오시면, 세상은 망해도 자기만은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세상에
대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저주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은 아닌가? 서로 돕고 연대할 생각은 하
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티끌이나 재만도 못한 주제에 감히 아룁니
다. 죄 없는 사람 오십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때문에 온 성을 멸하시겠습니
까?" 하고 기도하였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이 죄 많
은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 나는 소돔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가?
아브라함이 오늘 하느님을 만나 대화하는 상황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묻게 한다. 우리는
이런 세상을 바라보면서 저 아브라함처럼 하느님께 다가서며 대화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가?
아브라함은 지금 놀랍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하느님께 매달리고 있다. 저 도시
에 죄 없는 사람이 50명만 된다면, 45명만 된다면, 40명만 된다면....... 그래도 저 도시를 멸
하시겠습니까?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저 도시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매
달리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우리는 그렇게 세계를 위하여, 타인을 위하
여, 죄악의 도시를 위하여 아브라함처럼 하느님께 "다가서서" 매달리며 기도할 수 있는가?
애타다 못해 애처롭게 기도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아브라함은 지금 그 도시에 자기의 조카 롯이 있기에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의 도시 소돔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망했으면 좋겠다고 저주를 퍼붓고 싶은 이방인의 도시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19장에 나타나지만 이 이방인들은 하느님 보시기에 못된 짓만을 골라 하는 자들이다. 그런
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 하느님께 애처
롭게 매달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정의로운 마음을 감추며 자신을 티끌만도 못한 주
제라고까지 고백한다. 우리는 이방인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가?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티끌이나 재만도 못한 존재로 비하하며까
지 하느님께 빌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이 티끌이나 재만도 못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남을 위해서, 소위 내 눈에 하찮게 보이는 남을 위해서도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이방인을 외형상의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교회의 사명은 그
리스도인이든 이방인이든,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누구든 모든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없애는 데 있다. 이 마음에서 물질 중심적인 행동이 나오
고 타락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교회)는 우리들 마음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병폐는 치유할 생각은 하지 못하면서 그저
타인(세상)의 죄악을 보면서 놀랄 때가 많다. "어쩌다가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 과연
하느님은 존재하시는가? 도대체 하느님은 세상의 선을 원하시는 분인가?" 하면서 하느님의
선하심까지를 의심하면서 원망까지 한다. 태초에 세상을 선하게 만드시고 '보시니 좋더라'
감탄하시던 하느님의 착한 마음을 보지 못하고, 왜 악(인들) 때문에 의인도 고통을 당해야
하고 함께 죽어야 하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놀랍게도 이런 질문을 모
른다. 우리처럼 그런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아브라함이기에 하느님을 원
망하는 일도 없다. 오히려 "죄 없는 사람을 어찌 죄인과 똑같이 보시고 함께 죽이시려고 하
십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하고 대드는 아브라함의 말
투가 악한 세상을 옹호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는 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지금 하느님께 대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먼저 자기에게 "내가 하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하시며 말을 건네 왔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 하느님께
반문하며 대드는 아브라함은 여러 사람 중의 하나인 '그 어떤'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
고, 그 믿음 때문에 고향을 떠나기까지 한 신앙의 선조이다. 완전히 하느님께 의탁한 존재이
기에 아브라함은 지금 하느님의 마음을 자신의 능력으로 돌려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
고 있다. 그런 그가 하느님을 원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아브라함의 그 다가
섬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마음이다. 아브라함은 소돔을 멸하려는 하느님 마음에서 어떻게
해서든 인간을 구원하려는 사랑을 읽고 있고,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도 아브라함의 질문에
역정내지 않고 고분고분 다 들으시면서 아브라함을 통해 당신의 구원하는 마음을 알리신다.
이 이야기가 하느님께서 소돔에 내리실 벌을 아브라함의 마음 때문에 거두어들으신 것으로
끝을 맺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니느웨의 경우처럼(요나 참조).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이
독서가 어떻게 끝나는 줄 안다. 그래서인가. 오늘 성서의 마지막 구절이 여운을 남긴다. "야
훼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 고장으로 되돌아갔
다."(33절) 그 돌아선 모습이 안타깝다 못해 처절하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너희들은 저 갈릴래아의 도시가 그들이 악해서 벌을 받은 줄 아
느냐?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도 소돔을 멸하
신 하느님도 우리 인간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있다. 하느님께 다가가 매달리는 마음을 요구
하고 있다. 회개하지 않는 마음은 멸망하는 마음이다.
소돔의 멸망은 과거 속에 묻혀버린 일이나 언젠가 다가올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 회개하
지 않는 우리들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아브라함처럼 간절히 매달리면서 점점 하
느님의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느끼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소돔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메시
지는 그 '멸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약속에 있다. 하느님은 죄
인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을 원하신다. 사심 없는 자만이 하느님의 이 약속을 기억해 낼 수
있으리라.

다) 간사한 인간의 마음
소돔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멸
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마치 인간은 동정심과 자비심이 넘치는데 하느님은 몰인정하고
무자비한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가하면 세상에 왜 이렇게 악(인)이 많은가? 하느님은
왜 그(것)들을 버려 두시는가? 왜 그들을 멸하지 않으시는가 하고 원망의 화살을 하느님께
돌리기도 한다. 마치 인간은 공정한데 하느님은 불공정한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간
사한 이중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느님께서 멸하면 멸하신다, 멸하지 않으면 멸하지 않으신다, 분노하면 분노하신다. 사사건
건 꼬투리를 잡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마음으로는 만약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
지 않으셨다면 왜 멸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셨냐고 원망했을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까지도
인간의 변덕스러운 마음 상태에 따라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느님께서 그
런 얄팍한 인간의 잣대로 세상과 인간을 대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하느님을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당
신께서는 죄 없는 사람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 죄 없는 사람을 어찌 죄인과
똑같이 보시고 함께 죽이시려고 하십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 하고 간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해 자기의 공정성을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조심스런 다가섬이다. 아브라함과의 대화에서 참으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나타나 있다.
하느님은 쉽게 분노하시지 않는다.

라) 이방인을 위한 기도
아브라함은 지금 자기나 자기 동족을 위해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신
앙의 선조로 모시고 있는 우리도 우리의 영역밖에 있는 이방인을 위하여 하느님께 매달리는
자세를 배워야 할 것이다.

제2독서: 골로 2,12-14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
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잘못을 저질렀고,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영적
으로 죽은 사람들이었으나 이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시고 우
리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달갑지 않은 조항이 들어
있는 우리의 빚 문서를 무효화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 버리셨습니다.

1. 주석과 묵상

골로사이서는 헛된 철학(골로 2,8.16-23)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혼란을 겪고 있는 공
동체에 그분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을 지시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다. 여기서 헛된 철학은 "세속의 원리를 기초로 인간이 만든" 것으로(2,8) 그리스도교의 그
릇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헬라-유다의 중도 플라토니즘을 대변하는 가르침으로, 그리스도교
가 자신을 구원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골로 2,12-14는 헛된 철학을 반대한 논거의 부분이다. 헛된 철학에 따르면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구원의 요소가 필요하다. 이런 주장을 거슬러 골로사이서의 저자는 세례, 즉 그리스
도의 할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다고, 즉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지고(12절), 다시 살게 되고, 용서받은 존재(13절)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신약성서의 가장 오래된 고백(1고린 15,3-4)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내용으로 하고 있
다.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것은 "우리를 위해"(pro nobis) 일어난 일이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1고린 15,3-4). 골로사이서에 따르면
세례는 이 "우리를 위해"가 현실화되는 현장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공동체로 들어오게 된다.
골로사이서에서는 '죽음'이 '묻혔다'는 말로 사용되었다. 로마서에서는 이 두 단어가 동시에
나온다.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
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로마 6,4). 그러면서도 골로사이서는 로마서와 다른 뉘앙스를
준다. 로마서에서는 죽고 묻힌 것과 관련하여 부활이 미래의 사건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
다') 표현된 데 반해 골로사이에서는 이미 현재에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되고 있다('다시 일
으켜졌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둘을 서로 보완하는 개념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아직 올 나라이다. 그리스도 안에 이미 일어난 구원은 현재와 미래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할례(12절)는 11절에 나오는 "손으로 행하지 않는 할례"(200주년 번역. 공동번역
은: 형식이 아닌 진정한 할례), 그리고 12절에 나오는 '세례'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육체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8절). 세례는 새로운 할례로서 손으로 거행
하지 않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할례이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옛것의 속박에
서 벗어난다. 여기서 "이미 벌써"(12b)라는 단어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현재의 구원론"
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구원의 공간 안에 살아간다. "함께 묻혔고" "함께
일으켜졌다"는 이미 성취되었음을 나타낸다. 즉 일으켜졌다는 것은 이승의 삶에서 다시 태
어나거나 또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돌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의 이 삶이 세례
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었음을, 또는 새로운 삶이 현재 안에서 이미 벌써 성취되었음
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일으켜졌다'를 '다시 살아났다'로 번역한 공동번역
은 오해를 자아낼 수 있다). 이는 '함께 묻혔다'는 것이 이승의 삶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이 말해주고 있다. 세례를 통해 함께 죽었다는 것은 이 세상의 힘, 권세에서
벗어났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일으켜진 그리스도인은 이전의 빚을 탕감 받고
지금의 죄를 용서받아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13절에서
구원의 현재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전에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존재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
을 단순히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부활도 단순
히 육체적 죽음 이후의 다시 살아남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짓지 못하
는 삶은 살아있다 해도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이다. 바오로는 이렇게 육체적 생사를 떠나 생
과 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
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립 1,21). 이 편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죽음으로 일으켜진 그리스
도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을 분명히 밝힌다.

2. 강론 주제

가) 세례 - 수동의 삶
바오로에게 세례는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일으켜지는 것이다. 세례로써 우리는 그
분의 죽음과 그분의 일으켜짐에 동참한다. 우선 여기서 우리는 묻혔고 일으켜졌다는 동사가
수동태라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세례는 이제까지 자기 힘으로 살려는 생활 방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능력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례는 자기의 힘을 죽이고 하느
님의 힘으로 살겠다는 서약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힘에 의존한 능동적인 삶의 형태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힘에 자신을 맡
기는 수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다. 능동에서 수동으로 넘어가는 의례이다. 세례는 그리하여
자기의 힘을 죽이고 그분의 능력 안으로 일으켜지게 한다. 이것은 이어지는 14-15절에서 분
명해진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불리하게 책잡던 빚 문서들을 없애버리신 것이다. 이 문서는
힘의 논리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로 이 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이 힘을 치워
버렸다.
15절에는 권력과 권세를 무력화시켰다는 말이 나온다. 무력화시키는 것은 무장해제 하는 것
이고 자신을 죽이는 것인데, 이것이 세례를 통해서 일어난다. 그런데도 우리가 빚 문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장해제 하지 못한, 무력화시키지 못한 힘의 사용 때문이 아닐
까?

나) 세례 - 위하는 삶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위한(pro nobis)"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보면
"남을 위한 사건"이다. 이제 우리가 세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다면 우리도
우리편에서 "남을 위한 삶"을, 남들 편에서 "우리를 위한 삶"을 사는 발판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셨다고 고백하면서 이를 아전
인수격으로만 해석하며 끊임없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에만 머문다
면, "pro nobis"를 자기중심적인 '나의 구원'으로만 해석하여 머문다면, 그래서 '남을 위한
삶'으로 자기의 삶을 전개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세례를 하나의 형식으로 만드는 것외에
는 그 무엇도 아니다. 세례가 나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내'가 '남'을 위한 존재로 탈바꿈
할 때에 가능하다. 세례는 '남'을 위하여 살지 못하는 '나'의 존재를 죽이는 것이다. 세례는
자기 죽임을 통해 산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다) 세례 -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
오늘 독서의 핵심적인 사고는 세례가 일으키는 구원의 효력이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이 어
떤 방식으로 구원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와 함께' 일으켜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은 함께 믿고 함께 고백하고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함께 참고 함께 거짓 가르침에 대항해 싸우고 또 함께 죄와 대적하는 것이
다. 그렇게 해서 함께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희망하고 함께 사는 것이다. 이 모든 것
이 세례의 근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육체적인 생사관을 떠난 생사관에 따라 살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
니다."(필립 1,21).

라) 세례는 단순히 그리스도신자가 아닌 사람을 그리스도 신자로 만드는 형식적인 의례가
아니다. 세례를 받았어도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사람들보다 못하게 살 수도 있고 세례를 받
지 않았어도 그리스도 신자들보다 더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살 수도 있다. 세례는 그리스
도처럼 죽고 살기 위해 그리스도의 길에 입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끊임없이" 나는 수동의 삶을, 위하는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고
온 실존을 걸어 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결코 형식적인 의례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
스도인은 결코 형식적인 옷을 걸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세례를 받은 자들이 몸소 세상에
삶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복음: 루가 11,1-13

예수께서 하루는 어떤 곳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기도를 마치셨을 때 제자 하나가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
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 한 사람에게 어떤 친구가 있다고 하
자. 한밤중에 그 친구를 찾아 가서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친구 하나가 먼 길을
가다가 우리 집에 들렀는데 내어 놓을 것이 있어야지' 하고 사정을 한다면 그 친구는 안에
서 '귀찮게 굴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 걸고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네' 하고 거절할 것이다. 잘 들어라. 이렇게 우정만으로는 일어나서 빵을 내어 주
지 않겠지만 귀찮게 졸라대면 마침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청을 들어 주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
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
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
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
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1. 주석과 묵상

오늘 복음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우리가 기도하는 마태오가 전하는 주님의 기
도(6,9-13)와는 달라서 조금은 생소하게 들리는 주님의 기도 부분(11,1-4)과 끊임없이 기도
할 것을 고무하는 완고한 친구의 비유 부분(5-8절)과 그리고 신뢰를 가지고 기도할 것을 강
조하는 부분(9-13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님의 기도는 유대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간결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종말론적 실존을 미리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하나의 새
로운 기도이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말로 시작한다(1절).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
들이 다가가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한다. 그렇게 청하는 제자들의 자세에서 우리
는 '배우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기도하는 자세를 우리는 배워야 한다. 기도는 겸손 되
이 청하여 배우는 것이다.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
다" 하며 남을 가르치려는 자세에서는 올바른 기도가 나올 수 없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보
고도 "내게 이런 것말고 저런 것을 내놓으세요" 하며 무례하게 요구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기도하셨을까? 제자들은 예수의 기도를 배우고 싶어한다. 주님의 기도는 어쩌면 방
금 당신께서 기도하신 내용이었을 수도 있다. 배우는 자세로 겸손 되이 두 손을 모을 때 하
느님을 하느님으로 받들고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빛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느
님을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을 옳게 찬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비로
소 우리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라메아어의
원어는 '아빠'다. 기도는 아빠!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기도가 독백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아버지 하느님과 대화하는 사람으로서 그분의 자
녀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아버지 하고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첫째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빛내기 위해서이다. (공
동번역: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한다, 200주년: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이름'은 단순히 부르기 위한 기호만이 아니다. 이름은 불리는 이의 인격과 정체성과 그 전
부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름은 윗사람뿐 아니라 아무의 이름이라도 함부로 불러서
는 안 된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는 하느님이 아빠 아버지로서 계약에 충실하심을, 즉 당신의 은총과 자비를 드러내는 것이
다.
아버지, 하고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그 다음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느
님 나라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이다. 마르코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
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를 못 느끼고 있다. 그러한 한, 이 나라는 아직 오지 않은 나라, 아직
와야 할 나라, 아직 기다려야 하는 나라이다. 반대로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종말의 나라는
사실 이미 와 있는 나라로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호흡하며 느껴야 하는 나라이다.
3절은 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여기서 빵은 일용할 양식으로서 매일 먹어야 할 빵이다. 마
태오는 이 빵을 '오늘' 우리에게 달라고 쓰고 있지만 루가는 '날마다' 우리에게 달라고 한다.
마태오는 빵과 함께 '오늘'을 강조하고 있지만 루가는 이보다는 지속적으로 '매일'을 하느님
의 섭리에 맡기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어감의 차이는 있지만 날마다의 오늘이 이야기
되고 있다. 성서의 다른 곳에서 예수께서는 내일 먹을 빵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내일을
걱정하다보면 쌓아두게 되고, 더 호화스러운 것을 탐하게 되고, 부를 쫓게 되고, 남의 것을
빼앗는 일까지 생기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 능력에 맡기게 되며,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의 힘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고 오늘 일용
할 양식으로 족하여라. 날마다그렇게 살아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일용할 양식을 주십사
기도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할 때 가능하다. 주님의 기도는 내 힘의 의존에서 벗
어나 아버지의 섭리 아래 살게 해달라는 청원의 기도이다.
4절: '잘못한 이'는 '빚진 이'를 말한다. 아라메아어 '호바'는 빚을 뜻하지만 죄, 잘못을 뜻하
기도 한다. 빚진 이,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말은 자칫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 인간의 용서 여부에 달려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할 수 있다. 즉 "내가 너를 용
서했으니까 너도 나를 용서하라"는 말처럼 들려 하느님의 용서도 우리 인간의 행위에 따라
그 결과로 주어지는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 그러나 용서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 주님의 기도
의 용서도 용서를 받기 위해 남을 용서하고 빚진 이를 용서하라 말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나라 말의 "용서하오니"는 "용서하니까"를 연상시켜 불행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전의 "용서하듯이"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참고로 외국의 번역을 몇 개 나열해 본다. 영
어: forgive us our trespsses 'as' we forgive..... 독일어: vergib uns unsere Schuld, 'wie'
auch wir vergeben..... 그리고 라틴어: dimitte nobis debita nostra, 'sicut et nos
dimittimus.
용서는 나의 용서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으로 내 힘을 포기할 때 오히려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을 아버지, 하고 부르며 용서를 청할 때는 내 힘을 포기하는 삶이 강조되어 있다. 하
느님의 힘을 느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무조건 나를 용서해주셨기에 나도 용서할 수 있다.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용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용서는 과거
사를 잘 따지는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하는 힘을 느낄 때,
그래서 내 힘을 포기할 때, 과거에 묶이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다. 영원한 하느님께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는 자만이 진정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도는 전례용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에까지 소급하여 올라갈 수 있는 기도의
본보기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이 기도를 바칠 수 있어야 한다.
5-13절에서 주님의 기도에 이어 청원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
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7절의 ".... 거절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어서 예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과는 연결이 잘
안 된다. 문맥으로 보아 ".... 거절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지요? 그렇지 않겠어요?"라는 확신을
이끌어내어 인간들도 그러할진대 하느님께서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니 여러분도
구하고 찾고 두드리시오 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다. 13절의 말씀은 이 비유의 절정이다.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
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악한 인간도 자기 친구나 자녀의 (마르
10,18) 청을 들어주는데 하느님께서는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들어주시기만 하는 것이 아
니라 성령을 보내주신다.

2. 강론 주제

가) 기도
오늘 복음의 주제는 기도이다. 먼저 질문을 던져 보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해야만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실까? 기도를 하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실까? 기도하
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관심 하실까? 우리 기도의 정도에 따라 하느님께서도
그 수위를 조절하시어 들어주기도 하고 말기도 하실까? 다시 말해서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
께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우리는 간절히 기도를 해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
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것은 기도의 부족 때문일까? '열심'이 부족한 때문일까?
반대의 질문도 던져 보자. 왜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
가 있는가? 왜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원을 외면하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가? 기도하면
서 우리가 하느님께 청원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기도할 때 대단히 자기중심적일 때가 많다. 자기의 소원, 자기의 희망, 자기의 관심
사를 늘어놓으며 하느님께 그것을 들어달라고 청한다.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에게 예
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이런 우리의 자세를 수정하여 준다. 예수께서는 기도할 때 먼저
'아버지' 하고 부르게 하신다. 하느님을 '아버지' 하고 부르는데서 하느님과의 내면적인 관계
가 드러나는데, "주님의 기도"의 구조는 이 관계의 바탕 위에 짜여 있다. 자기의 관심과 자
기의 소원(3-4절: 일용할 빵 등)을 늘어놓기 전에 먼저 하느님(2절: 하느님의 나라)을 생각
하도록 한다. 기도를 들어달라고 청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의 삶의 한 복판에 활동
하실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 기도로써 하느님을 변화시키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해야 한다. 이 변화는 자기만의 공간을 하느님께 내드릴
때 가능하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마술적 힘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하
느님께로 향하게 하여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이 향함은 자기의 마음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드리는 것이다. 이때 기도하는 사람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
지소서"하고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습관적으로 주의 기도를 바치다 보면 우리는 쉽게 기도의 이런 구조와 내용과 의미를 지나
치게 된다. 그 내용을 마음에 담을 여유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 고해성사 때 '주님의 기도'를
비석에 새기듯 마음에 새겨보라는 보속을 준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주님의 기도를 몇 번
하라고 하셨어요? 한번만 하면 됩니까?"하고 물어왔다. 우리는 어느새 "주님의 기도 몇 번",
"성모송 몇 번" 이라는 습관적 도식에 젖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 한번도 그 내용을 마
음에 새겨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스도교의 가장 기초적인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다시 한번 그 구조를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
서"하고 기도하기 '전에'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하고 부르면서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
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느님께 먼저 공간을 마련하는 이 전반부의 기도 없이 후반부의 기도는 아무런
쓸모 없다. 먼저 하느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면서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자신을
떠나야(버려야) 한다.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소원
을 하느님께 아뢰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관심사와 하나되기를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기도한다면 이는 무엇보다도 "나를 당신 마음대로 하소서"하고 나를 하느님께 맡기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을 이용하여 내가 잘 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내
소원을 이야기하며 들어달라고 청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그런
기도를 많이 바치는가? 하느님을 찬양함이 없이 자기의 소원만을 아뢰고, 예수님 십자가 아
래 꿇어 예수의 십자가는 생각하지 않고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만을 내려달라고 파렴치하게
간구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기도는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나를 당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받
아들일 때, 그래서 내 자신을 떠나 그분의 뜻을 읽으려 할 때 올바르게 할 수 있으며 또 그
렇게 되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나)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라
이름은 단순히 부르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이름은 불리운 이의 전 인격과 전 존재를 나타
낸다. 때문에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다. 하느님의 이름뿐 아니라 인간의 이름도 마찬가지
이다. 윗사람뿐 아니라 나보다 못하거나 나보다 아래에 위치한 사람의 이름도 우리는 함부
로 불러서는 안 된다. 이름이 함부로 불리우는 사회라면 그만큼 그 사회는 서로에 대한 존
경이나 인격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서로에 대한 존경심으로 서로의 이름을 진
정한 이름으로 부르는 날 우리 사회는 신뢰와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 사
회는 겸손하게 서로를 존경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하느님은 본래 거룩하시고 그 이름 또한 본래 거룩하신데 왜 또 그 이름이 거룩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일까? 인간이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들지 못하기 때문일까? 자기의
힘에 의존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일까? 자기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려고 하는 인간의 명예욕
과 교만 때문일까?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만사를 내 이름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을 넘어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며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주권아래 살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도 하다. 제2독서 골로사이서에서 본 것처럼 오늘 복음에서도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의탁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힘을 포기할 때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하게 빛날 것이
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모든 것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거룩함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와 있는 아버지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는데도 오소서 하고 기도한다면 인간은 자기의 나라를 건설
하려는 데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힘으로 살려는 의
지가 강하여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보게 해달
라고 기도한다. 기도를 하기 위해 우리가 '아버지'하고 부르는 것은 내 이름이 아니고 아버
지의 이름을 빛내고, 내 나라가 아니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비는 것이 기도이다. 철저히
수동의 존재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다) 당신을 느끼게 해 주소서
주님의 기도는 우선 하느님 나라가 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오소서'가 기도의 근
본에 깔려 있다. 그렇다. 기도는 '이미 왔음'을 체험하지 못하는 인간의 상황에서 이미 온 하
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달라는 염원이다. 이 염원이 '오소서'라는 간절한 말마디로 표현된
다.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주님께서 오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위해 달라는 말마디
로 이어진다.
그 주님은 우리의 아빠다. 격식 없이 부를 수 있는 이름.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 베여있는
이름. 거리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 하늘에 계신 나의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
가까이 와 계신다. 피부로 느낄 만큼. 그 하느님을 느끼기 위해 굳이 내가 하늘로 올라갈 필
요가 없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땅으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빠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느님, 나로 하여금 이를 느끼게 해주소서. 당신을 내 내면 가장 깊은 원천으로부터 아빠라
부르게 해 주소서. 이 몸으로 당신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해 주소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나는 내 몸을 내 내면의 소리가 들려오는 원천으로 이끌어 달라고,
내면의 소리가 들려오는 원천의 광채로 빛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당신의 이름을 거룩히 빛
나게 하도록 이 몸을 당신의 거룩함으로 빛나게 해달라고. 내가 창조되던 그 태초의 고요와
사랑으로 비추어 달라고. 그 사랑으로 아름답게 빛나게 해 달라고. 천지 창조 이전부터 내 몸
안에 계셔서 이 몸을 빛나게 하던 그 빛남을 매 시간 새롭게 체험하게 해 달라고. 당신의
이름을 내 이 몸으로 거룩히 빛나게 해 달라고.
그런데 나는 나의 이 빛남을 자주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나의 이 몸은 욕정으로 가득 차
있다. 욕정에 가리어 내 몸을 당신의 성사로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내 몸을, 그리고 세상의
몸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주님 오소서. 당신은 이미 처음부터 내 몸 안에서 나와 함께 계
시지 않았습니까?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의 뜻이 이 지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당신의 뜻이 내 몸에 이루어지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우리는 이 기도를 인간의 고달픈 상황에서 바친다. 이 고달픔은 때때로 내 몸 안
에 주님의 위대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지 못하는 장애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배고플
때, 괴로울 때 나는 배고픔과 괴로움에 짓눌려 주님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나는 배고플 때 주님의 손길을 느끼고자 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용서가 안될 때 나는 주님의 용서하는 손길을 느끼고자 한다. 우리에게 잘 못한 이를 용서
하게 하소서. 나를 용서하는 당신의 손길을 느끼게 해주소서. 용서하고 싶지만 용서가 안 되
는 것만큼 괴로운 것이 있을까? 때문에 나는 용서 못하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을 이해한다.
그는 용서를 하지 못해 차가운 인간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괴로워하며
용서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기도한다. 주님 이 괴로움 속에
서 당신을 느끼게 해 주소서. 유혹 속에 당신을 보게 해주소서. 지옥에서 당신을 보게 해주
소서.

라) 참다운 기도(수동의 영성)
주님의 기도에 이어지는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철저히 수동의 자세를 보여 준다. 언뜻 듣기엔 능동을 강조하는
것 같다. 그러나 "받고 얻고 열리고..."의 동사에서 보듯이 인간에게 철저히 수동의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받는 자세 열린 자세를 취할 때 참다운 기도를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인
간은 '능동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조차도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려는 힘마저
포기했을 때 참다운 기도가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기도이다. "제가 불고 싶은 대
로" 부는 성령(요한 3,8)께 맡길 때 참다운 기도를 할 수 있다.
하느님을 협박하듯이 청해서 받아내고야 말겠다, 두드려 열고야 말겠다는 인간의 억지의 힘
이 들어간 상태로는 올바로 기도할 수 없다. - 물론 그렇게 애교를 부릴 수는 있겠지만 -  
예수께서는 지금 그런 기도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기도는 내 의지를 꺾고 내
힘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맡길 때 가능하고, 또 그러기 위해 기도한다. 수동의 자세로만 참다
운 기도를 할 수 있고, 우리는 또 그 수동의 자세를 몸에 익혀야 한다.
청하라. 받지 않았다 싶으면 또 청하라. 지칠 때까지 청하라. 지쳐 더 이상 청할 힘마저 없
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드디어 우리에게 채워주실 것이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끈질긴
기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끈질기게" 청하는 모습이 아니라 "힘이 빠
진" 모습을 보고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닐까? 더는 버틸 것이 없게된 힘없는 모습
을 보고 말이다. 내 힘이 다한 곳에서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느낄 때 인간은 모든 것이 이미
자기에게 주어져 있고 모든 것이 은총 속에 열려 있음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미 다 주셨다. 이미 처음부터 당신의 마음을 다 열어
주셨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내 힘으로 보고 내 힘으로 얻으려 하였기
때문이다. 내 힘에 가리어 이미 다 주어진 것을 보지 못하고 이미 열려 있는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 힘이 다 한 곳에서 나는 비로소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내가 청하기
도 전에 내게 모든 것을 이미 다 주셨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내 힘이 다한 곳에서 나는 나와
늘 함께 동고동락하고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다음 구절이 이를 말해 준다. 생선
을 청하는 자녀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11절) 하느님께선 이미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셨다. 뱀이 아니라 생선을 주고 계셨다. 이 '알게 됨'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기도이
다.
힘이 포기된 이 경지는 성령의 경지이다(13절). 우리는 이미 성령으로 태어난 존재이다. 이
사실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받고 태어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문이 열려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내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하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을 느끼고 그분과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라. 기도하는 자는
이를 안다. 또는 모르기에 기도한다.
기도는 결국 내가 모든 것을 받았다, 모든 것이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것이다. 기도
할 때 그래서 나는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연중 제 18주일

제1독서: 전도 1,2;2,21-23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지혜와 지식을 짜내고 재
간을 부려 수고해서 얻은 것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겨 주어야 하다니, 이 또
한 헛된 일이며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제 아무리 애를 태우며 수고
해 본들 돌아올 것이 무엇이겠는가? 날마다 낮에는 뼈아프게 일하고 밤에는 마음을 죄어 걱
정해 보지만 이 또한 헛된 일이다.

1. 주석과 묵상

전도서는 처음 읽는 사람뿐 아니라 유다-이스라엘인에게도 하느님과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부정하는 허무주의 인상을 주어 당황하게 한다. 하지만 전도서의 마지막에 설교자가 "아들
아, 한 가지 더 일러 둘 말이 있다. (....) 들을 만한 말을 다 들었을 테지만,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의 분부를 지키라는 말 한 마디만 결론으로 하고 싶다. 이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
다."(12,12-13) 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당
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헛되다고 선언하는 설교자(전도자)의 의도는
무엇인가?  
"세상만사 헛되다"라는 표현은 전도서의 첫 장에서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이 책 전체의
밑바닥을 관통하고 있다. 이 말은 전체 맥락에서 알아들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설교자가 표
현하고자 하는 것은: "나는 모든 것을 즐긴다. 모든 것이 내게 사용하도록 주어졌다. 하지만
나의 정체성과 나의 행복을 그 안에서 찾지를 못하였다"는 것이다. "향락에 몸을 담가 행복
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더니 그것 또한 헛된 일이었다. 웃음이란 얼빠진 짓이라, 향락에 빠져
보아도 별 수가 없었다"(2,1-2). 인간이 세운 목적, 인간의 지식과 지혜 그리고 계획은 허무
하거나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죽음이 이를 말해준다. 지혜 있는 자도 어리석은 자도 죽기는
매한가지이다(2,16).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
라져 버린다. ...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죽지 않는가?"
왕조시대에는 땅과 인간과 성소가 모두 하느님의 아들 왕에게 속했다. 왕조는 모든 것을 동
등하게 분배하던 그 전의 씨족 공동체를 붕괴시켰다. 유배 이후 느헤미아는 갈수록 벌어지
는 빈부격차를 없애보고자 노력하였다. 전도서가 쓰여진 3세기에는 세금이 과중하게 매겨져
전 가족이 빚지고 또 노예가 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설교자는 자기가 관찰한 것을 옛
날의 그러나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지혜와 나란히 놓으면서, 선은 "자동적으로" 상을 받고
악은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망상이라는 관점을 분명하게 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
만사 헛되다" 라는 유명한 1장 2절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
혜와 노력(2,21-23) 또한 헛되다.
지혜와 지식을 짜내고 재간을 부려 수고해서 얻은 것을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남
겨 주어야 하다니, 이 또한 헛된 일이며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2,20). 사람이 하늘 아래서
제 아무리 애를 태우며 수고해 본들 돌아올 것이 무엇이겠는가? 날마다 낮에는 뼈아프게 일
하고 밤에는 마음을 죄어 걱정해 보지만 이 또한 헛된 일이다(23절). 성서는 빵을 얻기 위하
여 매일 뼈빠지게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창세 2,5.15; 3,17-19; 잠언 10,4;
24,2-34), 밤에는 쉼이 선사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시편 104,22 이하; 127, 2; 잠
언 3,24). 하지만 전도 2,23은 밤에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다. 그래서 헛되다. 창조에 대해 불
신을 강하게 느끼게 해준다. 1장 13-14절에 이야기한 것("하느님께서는 괴로운 일을 주시어
고생이나 시킨다는 것을 알기에 이르렀다. 하늘 아래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니 모든 일은 바
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을 확인시켜 준다.
이렇게 해서 설교자는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그런 식으로 하느
님을 찾을 수 있다는 사고를 완전히 부정한다. 그리하여 설교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24
절에서 벌써 느낄 수 있다.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만큼 사람에게 좋은 일
은 없다". 쾌락주의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손수 내리시는 것이다. 하느님께
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게 해 놓으셨다. 여기에 설교자의 의도가
드러난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길 때 헛됨을 벗어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3장
에서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말로 표현한다.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날 때가 있
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으면 살릴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애곡할 때가 있으면 춤
출 때가 있다. ...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싸움이 일어날 때가 있으면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 그러니 사람이 애써 수고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하느님
께서 사람에게 시키신 일을 생각해 보았더니,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가도록 만드셨더라."(3,1-11)
하느님께서 하신 이 일은 인간이 하느님의 일을 분석하는 지식이나 지혜로 터득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혜를 '헛되다'고 표현한 것은 결국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지혜
를 터득하라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느님을 찾는 것도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맡길 때 자기가 하느님 안에 숨쉬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로써 설교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1) 인간은 세상의 전부와 영원을 설명하려 하면 무리하게 된다.
2)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른 설명은 부패와 억압의 상황에 직면하여 볼 때 순진한 발상이다.
3) 부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산 삶의 상이고 가난과 병은 벌이라는 계산은 눈에 띄지 않
는다.
4) 모든 세대는 자기의 삶을 스스로 구축해야 한다(1,4-11).

2. 강론 주제

가) 인간의 힘과 지혜와 지식의 허무
인간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식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을 향한 삶을 살 때 허
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부와 명예와 인기와 성공을
향하여 치닫는 현대의 물질적인 삶은 허무를 예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오늘 제1 독서는 허
무를 향하여 달려가는 듯한 현대인에게 진실한 삶을 알리는 지혜의 소리이다. 이 독서는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라는 오늘의 제 2 독서로 보완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허무한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지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 지
상의 것이 허무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거기에 인생의 전부를 걸고 그것
을 목적으로 알고 달려가는 삶의 결과가 허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
에서 예화를 든 데서도 분명해진다. 탐욕과 욕망의 결과는 허무일 수밖에 없다.

나) 매일을 하느님께 맡긴 삶
공중의 새들은 허무를 모른다. 재물을 쌓고 재물로 자기 힘을 키우는 자만이 허무를 체험한
다. 다음의 복음 말씀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
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
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성당 천막 조립 방법 file 남궁춘배 2017.08.27 126
공지 만남자료실 이용 안내 1 박철현 2017.01.29 119
37 매일미사 8월,9월 3 file 강신국 2007.08.27 3024
36 김이보의 터키 순례 이제민 2004.11.04 6864
35 독일 TV 방송편성표 보는 프로그램... file 이현준 2004.10.26 3826
34 한글로 작성된 문서 보는 방법 이현준 2004.08.09 2475
» 강론: 연중17-18주일 운영자 2004.08.02 2292
32 평화의 십자가 file 남궁춘배 2004.07.12 2100
31 사진 작업 (크기 줄이는) 프로그램 이현준 2004.07.08 2194
30 글씨체 파일 1 이현준 2003.12.31 9895
29 지난 자료실....파일들... 운영자 2004.07.01 2420
28 배구대회 김부남 2004.06.13 2020
27 만남원고 터키 성지순례2 초고 실베리오 2004.05.25 1661
26 리간재 시몬 형제님께 드리는 원고 두번째 입니다. 최성욱 2004.05.21 1594
Board Pagination Prev 1 ... 7 8 9 10 11 12 13 14 15 16 Next
/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