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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media.daum.net/entertainment/art/200309/18/fnnews/v5030599.html
파이낸셜뉴스  2003.9.18(목) 18:45
  
[대문호, 괴테는 누구인가] 그가 있었기에 세계문학사를 다시 썼다

“만약 독일 민족이 이 지상에서 멸망해 버린다면, 그때 그 이름을 가장 빛나게 해주는 것은 ‘니벨룽의 대사사시’와 괴테의 ‘파우스트’다.”

독일 문학사에서 괴테를 언급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구절이다.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1832년 3월 22일 83세의 나이로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쳤다. 아버지 요한 카스파 괴테와 어머니 엘리자베트 텍스토르는 1748년, 그러니까 아버지가 38세, 어머니가 17세가 되던 해 결혼했고 이듬해인 1749년 첫아들 괴테를 낳았다. 오늘날에도 괴테 강의 시간에 천재 자녀를 원하면 부부의 나이 차가 적어도 20년은 되어야 한다는 농담이 오가곤 한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일생을 한직(閑職)에 머물렀으나, 여러 분야에 박식했고 왕실 고문관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아야 부인으로 불렸던 어머니는 프랑크푸르트 시장 요한 볼프강 텍스토르의 딸로, 괴테는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다. 괴테의 부모는 자녀를 여럿 낳았으나 모두 일찍 잃어버리고 괴테와 누이동생 코르넬리아만 남자 그들의 교육에 열성을 다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괴테는 17세에 벌써 고대 및 근대 각국의 언어를 비롯하여 역사, 문학, 신학, 정치, 법학,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교양을 익혔으며 특히 음악에서는 피아노와 첼로, 회화에서는 수채화에 능통할 뿐 아니라 승마, 무술, 무용에서도 뛰어났다고 한다.

괴테는 16세가 되던 1765년 가을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에 유학해서 법학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전공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한편 문학과 예술에 더 열중했으며, 술집 처녀 카타리나 쇤코프(애칭 케트헨)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자유분방한 학창 생활로 사랑은 곧 파탄에 이르고 방종했던 생활의 여독으로 쇠약해진 그는 객혈까지 하게 되어 19세(1768)에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온다.

1년 반에 걸친 병상 생활로 건강이 회복된 괴테는 21세(1770)에 슈트라스부르크로 간다. 학업에 큰 성과도 얻고, 그의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헤르더를 알게 된다. 그리고 교외에 있는 제젠하임에서 마을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과 목가적인 사랑을 나누었고 약혼까지 했으나, 결국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하고 떠나 버린다. 순진한 프리데리케는 첫사랑에 버림을 받은 다음 시골에 파묻혀 60년동안 고독한 세월을 보냈다. 새로운 사랑을 할 때면 여성으로부터 최대의 것을 섭취한 다음 보다 높은 비약을 위해 여성을 떠나는 것이 천재 시인에게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이 점은 그가 훗날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는 원인이 되었으며 괴테 자신도 미안한 마음과 양심의 가책을 깊이 느꼈다고 한다. 이후 ‘파우스트’에서처럼 순진한 처녀를 버려 놓은 젊은이가 죄값을 치르는 것을 줄거리로 하는 많은 작품에는 그녀의 모습이 부분적으로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프랑크푸르트에 돌아온 그는 23세(1772)에 아버지의 권유로 베츨러라는 소도시의 고등법원에서 몇 달 동안 실습을 한다. 이때 케스트너라는 외교관의 약혼녀 샬로테 부프와 경험한 사랑의 비련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이 탄생했는데, 이 한 편의 소설로 괴테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1775년 26세의 괴테는 부유한 은행가의 딸 엘리자베트 쇤네만(애칭 릴리)과 다시 사랑을 하고 3개월 후 약혼까지 했으면서 결혼 결심을 하지 못한 채 주저하고 있었다. 마침 같은 해 11월 바이마르공국의 젊은 대공(大公)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을 받고는 약혼을 파기하고 바이마르로 갔다. 바이마르에서 괴테는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 12년에 걸친 연애를 하며 인간적?^예술적 완성에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지만, 1786년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남으로써 부인과의 애정 관계 역시 끝을 맺고 만다.

2년 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1788년 바이마르로 돌아온 39세의 괴테는 가난한 서민의 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23세)를 만나 동거하면서 비로소 가정의 행복을 누렸다. 친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806년 그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으며,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는 괴테를 둘러싼 수많은 여인들 가운데 유일한 아내가 된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가였던 괴테는 만년에도 세 차례의 연애를 체험한다.

그 하나는 1807년 예나에 머물면서 서점 주인 프롬만의 양녀 민나 헤르츠리프에 대한 사랑이었으나 곧 도피했고, 그녀를 모델로 하여 소설 ‘친화력’(1809)을 썼다. 또 하나는 아내 불피우스가 세상을 떠난 뒤 알게 된 마리안네 폰 빌레머 부인과의 사랑으로 쓴 ‘서동시집(選詩集)’(1819)은 그녀를 사모하여 읊은 시를 모아 간행한 것이다. 마리안네는 사실 프랑크푸르트 은행가 뷜레머의 자비로 고아라는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 그의 딸과 같이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상처한 괴테의 마음이 쏠릴 것을 염려한 뷜레머가 재빨리 정식 아내로 공표하여 그의 후처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괴테는 마리엔바더로 피서 여행을 갔다가 74세의 노령으로 19세의 처녀 울리케 폰 레베초프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사랑은 그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연모의 정이 시집 ‘마리엔바더의 비가’(1823)에 잘 나타나 있다.

80년이 넘는 긴 생애에서 그의 삶과 문학은 이처럼 여러 여성의 힘으로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괴테는 죽기 반년 전인 1831년에 완성한 ‘파우스트’ 2부를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라는 구절로 끝맺었다. 그레첸의 사랑이 영원한 여성적인 힘과 합쳐서 파우스트를 무한의 높이까지 인도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다. 1832년 그의 유해는 바이마르 대공가(大公家)의 묘지에 대공과 실러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윤용호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