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다녀온 날

by 박철현 posted Feb 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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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금요일이 마음 편한 날입니다.

예전에는 금요일에는 2구역과 4구역 소공동체 모임 때문에

두 번의 미사가 있었고,

오전에는 합창단 연습도 있었기 때문에 은근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요즘에는 합창단 연습은 월요일로 옮겼고,

소공동체 미사도 2구역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시간적인 여유도 생기게 되고 마음이 한결 편해진 건 사실입니다.

물론 그래서 이제는 소공동체 하는 날 말고는

금요일 오전미사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긴 하지만

이게 또 다시 신자분들에게 짐을 지우는 일이 아닐까 싶어

망설이고 있기도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주일미사 나오는 일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인데

평소에 평일미사를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분들만 부담스러워진다면

그것 역시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건 요즘 금요일은 저에게 조금 마음 편한 날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회장님과 함께 현금 인출을 위해 은행에 다녀왔습니다.

저희 본당 통장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가야만

현금을 인출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저와 총무님이 그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편의 상 저와 회장님 두 사람이

함께 가야만 현금을 인출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한국보다 더 까다로운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느 본당이라도 대개 신부님의 승인을 받고 난 뒤,

사목협의회의 총무부장님이나 재경부장님의 사인을 받으면

사무장님 혼자서 은행 업무를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결제 업무는 성당 안에서 이루어지고,

은행에는 사무장님 혼자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늘 저와 회장님이 함께 가야 합니다.

함께 가서 은행 카드를 보여준다고 해서 바로 현금을 인출할 수도 없습니다.

은행 직원이 저와 회장님의 여권을 확인하고

무언가를 꼼꼼하게 적은 뒤에 현금을 인출할 수 있는 확인증을 주면

그걸 가지고 창구로 가서 현금을 받을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은행에 갈 때마다 매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물론 꼼꼼하고, 정확한 건 좋지만

사람이 바뀐 것도 아닌데 매번 그렇게 인출을 위해서는

여권과 비자를 들고 다닌다는 건

솔직히 쓸데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금전과 관련되는 일이기 때문에 정확해야 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은행 업무는 기본적으로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만일 저와 회장님이 짜고 돈을 마구 인출해서 횡령하고자 하면

그게 혼자든 둘이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건 세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서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된다면

아무리 정확하고 꼼꼼해도 그다지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본당의 재정이 몇 억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일 년 예산을 모두 해봐야 3만6천유로 정도입니다.

그걸 빼내서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만큼 큰돈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고,

또 저는 그렇게 쪼들리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본당의 돈을 결코 허투루 사용한 적도 없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건 저뿐만 아니라 회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믿지 못한다면

어떤 신자분이라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확인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신뢰가 먼저 선행되지 못한다면

지금의 시스템을 가지고도 어디에든 구멍은 분명 생길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튼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은행에 가야 하는데

그게 쓸데없는 낭비라는 생각이 들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게 여기의 시스템이니 거기에 순응하는 수밖에는 없겠지요.

시스템보다는 사람을 신뢰하고

그리고 그 사람 역시 신뢰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일이

훨씬 더 소중한 일임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