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한인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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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지난 한 해 동안 

행복하고 기억에 남는 순간의 심지를 뽑으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손주들과 함께 했던 

12 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일 것이다.

 

그 날 큰 딸이 손주 둘을 데리고 왔다.

손주들을 그리워 하는 아빠를 위해

큰 딸이 마음을 쓴 것이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속에서는 행복한 기분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손녀 Sadie가 'Christmas Alphabet'이라는 

그림책을 들고 왔다.

크리스 마스와 관련된 단어를 그림과 함께 실어 놓은 그림책이었다.

말하자면 그 그림책을 함께 보자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런 그림책은 그냥 단어만 나열이 되어 있기에

단어를 읽기만 하면 아무 재미가 없다.

아이 다섯을 키운 경험으로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가령 'B' 항목엔 Jingle 'Bell'이라는 단어와 그림이 함께 실려 있는데

이런 대목에서는 그냥 '징글 벨'이라고 밋밋하게 읽으면 너무 심심하다.

상상력을 동원해서,

아이의 수준에 맞추어 율동과 함께 노래도 불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알파벳 'C'에는 'Candy Cane'이 등장하는데

이럴 때도 그냥 캔디 케인이라고 읽기만 한다면

아이를 감동시킬 수가 없는 법이다.

호들갑을 떨면서

 

 "와우 맛 있겠다."

"Sadie, do you want some candy cane on Christmas?"

 

이렇게 사설과 발림, 추임새를 넣어가면서

아이의 흥미를 끌어야 하는 것이다.

 

하부지의 재롱에 재미가 있었던지

Sadie는 내게 그 그림책을 읽고 또 읽어 달라고 했다.

 

그 날 나는 그 그림책을 열 번도 넘게 읽어 주었다.

 

Sadie를 내 무릎에 앉히고 (영어로 번역하자면 'lap top')

그림책을 읽어주던 그 시간이

작년 내게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 기억을 꺼내 볼 때면

오래 된 가족 사진 속의 장면처럼 흐뭇한 미소가 절로 피어난다.

 

Sadie가 무슨 선물을 가져 온 것도 아니었다.

노래나 춤 같은 개인기로 날 즐겁게 해 준 것도 아니었다.

Sadie는 내 무릎에 앉아서

내가 읽어주는 그림책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었다.

 

내 무릎 위에 앉았던 Sadie의 무게,

바로 그 존재의 무게 때문에 내가 그리 행복한 것이며

틈 날 때면 그 기억을 떠 올리며 혼자서 히죽거리는 것이다.

 

Sadie는 내게 빈 손으로 왔다.

 

'빈 손'

 

그러나 결코 비어 있지 않은,

그리고 가볍지 않은

그 아이 존재 전체를 내게 선물로 가져온 것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누군가의 존재, 그 자체일 것이다.

선물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present'에는

선물이라는 의미 외에, '현재'와 '있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Sadie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하부지에게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내 무릎에 앉아서

가끔씩 내 눈을 맞추며 

'하부지'하고 부르던 Sadie 목소리를 추억하며

'뼈가 녹을 것 같은' 희열에 빠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