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한인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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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세계 평화의 날’(1월 1일) 담화 요약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은 ‘형제애,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길’이라는 주제로 담화를 발표, 전 세계 모든 민족이 참다운 형제애를 발견하고 경험하고 선포하고 증언할 것을 당부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지난 1967년 12월 8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맞아 1969년 1월 1일을 ‘평화의 날’로 제정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교회는 1968년부터 1월 1일을 ‘평화의 이념과 평화적인 해결 및 세계의 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로 지내고 있으며, 교황은 특별한 주제와 함께 교회 안팎에 메시지를 발표한다. 다음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 세계에 처음으로 전하는 담화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형제애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strong>

형제애는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분명한 의식은 우리가 서로를 참된 형제자매로 여기고 대할 수 있게 해줍니다. 형제애가 없으면 정의로운 사회를 이룰 수도 없고, 확고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이룩할 수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형제애를 가정에서 먼저 배웁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의 모든 구성원,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책임 있고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통하여 형제애를 배웁니다. 가정은 모든 형제애의 원천이고 형제애의 바탕이며 형제애로 가는 중요한 길입니다. 가정은 그 소명에 따라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상호연결과 의사소통이 점증함에 따라, 우리는 여러 나라 사이에서 일치와 공동 운명체 의식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서로를 받아들이고 돌보는 형제자매,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소명은 우리가 다른 이들의 고통에 점차 ‘둔감해지고’ 우리 자신 안에 갇혀버리게 만드는 ‘무관심의 세계화’라는 특징을 보이는 세상에서 여전히 자주 거부되고 무시됩니다.

형제애의 기초는 하느님의 부성

이 세상 사람들이 과연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심어 주신 형제애에 대한 갈망에 온전히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무관심, 이기주의, 증오를 극복하고 형제자매들에게 당연한 일반적인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주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답을 간추려 볼 수 있습니다.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9 참조).

형제애의 기초는 하느님의 부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막연하고 역사적으로 비현실적인 유전학적 부성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하고 매우 구체적인 인격적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마태 6,25-30 참조). 하느님의 사랑은, 일단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의 삶과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변화시켜 연대성과 참다운 나눔에 우리 자신을 열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간의 형제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생겨납니다. 모든 이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 누구도 우리 형제자매에게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형제애 원칙 증진하는 정책 필요

이런 의미에서 형제애가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길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에서 우리는 민족들의 온전한 발전이 평화의 새 이름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또한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에서 평화가 연대의 열매(opus solidaritatis)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인간이든 민족이든 국가든, 일종의 도구로 보지 않고, 저가로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과 체력을 가진 존재로, 그리고 더 이상 효용이 없을 때에는 내버릴 것으로 보지 말고, 우리 ‘이웃’으로, ‘돕는 이’로” 보아야 합니다.

빈곤 또한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형제적 관계를 재발견하고 중시할 때에만, 살아가면서 겪게 마련인 기쁨과 슬픔, 어려움과 성공을 서로 나눌 때에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같은 지역 또는 같은 역사문화적 상황 안에 사는 사람들과 집단들 사이의 상대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형제애의 원칙을 증진하는 효과적인 정책이 필요합니다.

빈곤을 물리치는 또 다른 방법은 바로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양식을 선택한 사람들의 초탈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누어 다른 이들과 형제적 친교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본입니다. 청빈을 서원한 봉헌 생활자들의 경우만이 아니라 수많은 가정들과 책임감 있는 시민들의 경우도 해당됩니다.

오늘날의 경제 위기도 사람들의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주면서도, 예지와 절제와 정의와 용기의 사추덕을 되찾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추덕은 형제적 유대를 재발견하도록 도우며, 특히 사추덕은 인간 존엄을 바탕으로 사회를 건설하고 유지하려면 꼭 필요한 것입니다.

형제애는 사회적 평화를 낳아

저는 저의 선임자들과 한 목소리로 무기 확산 금지와 모든 당사국들의 군비 축소를 호소합니다. 이는 핵무기와 화학 무기의 축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사람 안에서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형제자매를, 모든 이를 위한 충만한 삶을 일구고자 함께 일해야 하는 형제자매를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 기관들을 포함한 시민 사회가 평화 증진을 위하여 펼치는 수많은 활동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정신입니다.

형제애의 지평은 또한 모든 사람의 충만한 실현에 대한 요구와 관련됩니다.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품고 있는 정당한 포부가 좌절되거나 침해당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 포부를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도 꺾여서는 안 됩니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마련인 불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형제자매이고 따라서 우리 이웃을 물리쳐야 하는 원수나 적으로 여기지 않도록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형제애는 사회적 평화를 낳습니다. 형제애가 자유와 정의 사이에, 개인적 책임과 연대 사이에, 개인의 선익과 공동선 사이에 균형을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 공동체는 투명하고 책임감 있게 이 모든 것을 증진하고자 활동하여야 합니다.

또한 저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의 근본 원칙들 가운데 하나로서 반드시 필요한, 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모든 이에게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이 원칙을 존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고 가질 권리가 있는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재화에 효과적이고 공정하게 접근할 수 있게 돕는 근본 조건입니다.

형제애는 선포하고 증언해야

형제애는 발견하고 사랑하고 경험하고 선포하고 증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사랑만이 우리가 형제애를 받아들이고 온전히 체험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린 자세가 없으면, 모든 인간 활동은 피폐해지고 사람들은 착취당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 얻게 되는 그 폭넓은 차원으로 나아갈 때에야 비로소, 정치와 경제는 형제적 사랑의 진정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질서를 이루고, 온전한 인간 발전과 평화의 효과적인 도구가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요구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곧, 나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까지 포함해 다른 이들의 고통과 희망에 언제나 귀 기울이며 공감하고, 모든 형제자매의 선익을 위해 기꺼이 온 힘을 다해 헌신할 줄 아는 그 사랑의 힘든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를 끌어안으시고 단 한 사람도 잃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6-27).

그러므로 모든 활동은 사람들, 특히 가장 멀리 있고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한 봉사의 자세를 특징으로 하여야 합니다. 봉사는 평화를 이룩하는 형제애의 혼입니다.

가톨릭신문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