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한인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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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그리스도 이해

1. 머리말

  많은 사람들이 현대를 일컬어 전환시대요, 위기의 시대라고 한다. 이 점은 우리의 신앙상황에도 해당한다. 문화, 정치, 경제, 사회적 차원에서 목격할 수 있는 갖가지 전복과 변화를 우리는 신앙생활의 여러 차원에서도 체험하고 있다. 기톨릭 교회는 1960년대에 소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해서 신앙과 교회 자체의 쇄신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교회가 쇄신작업을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교회의 정체를 둘러싸고 상반되는 견해들이 등장하여, 때로는 격렬하기까지 한 논쟁이 신앙인들 사이에서 일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자칫 하나인 교회의 신앙이 그 명료성과 증거능력을 상실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조차 했다. 이 상황을 많은 신자들이 위기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공의회 직후에는 가톨릭 신자들의 관심이 교회의 본질을 규정하는 데 집중되어 왔으나, 오늘날 신자들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문제에로 집중되어 있는 느낌을 받는다. 교회가 처해 있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근거와 의미인 구체적 인격,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正體)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청된다는 점에서 이 현상은 오히려 당연하고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나자렛 예수를 인류의 구세주로 인정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는데 온 것은 교회였다.” 라고 하면서 현존하는 그리스도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 사실은 교회의 원천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성찰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함을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원천이자 의미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물음은 그리스도 신앙의 존폐와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나자렛 예수라는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인물을 인간이된 하느님의 아들로서 전인류와 세계의 구원자요 완성자라고 고백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다”라는 이 신앙고백은 그리스도 신앙의 유일무이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물음은 결국 신앙인인 우리들 자신의 운명이 좌우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누구인가”하는 물음이 절실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20세기 종반기를 사는 우리는 이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직접 대하지 못하고 오직 성서와 교회전승(敎會傳乘)의 도정을 통해서만 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신앙이 의문에 붙여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래 강력하게 대두되기 시작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서였다. 교회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와 2천년 전 유다지역에서 생활했던 나자렛 예수라는 인물은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견해가 성서주석학에서의 역사비판양식(歷史批判樣式, Historisch - kritische Methode)에 의거하여 예수의 생애를 연구했던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예수의 인격과 그의 행업을 둘러싼 잡다하고 상반되는 견해가 대두됨으로써, 바로 신앙의 원천 자체가 불확실한 기초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난처한 처지에서 ‘현대의 그리스도 이해’라는 주제로 자신있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란 불가능하다. 다음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는 한 가톨릭 신학자의 입장 표명임을 밝히고 싶다. 우선 예수생애 연구를 통해서 드러난 문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물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는 현대 신학의 일반적 경향을 소개하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현대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새로운 그리스도 이해 양식

  나자렛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이라는 그리스도 교회의 공식교리를 4차에 이르는 초기 공의회의 결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3세기 동안의 박해시기를 끝낸 그리스도 교회는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착되면서 예수가 생활했던 유다문화권에서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 문화권에서 자신의 정체를 정립하는 작업에 착수하였고 이를 위해 소집되었던 공의회에서 관건이 되었던 주제는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정체를 규정하는 문제였다.
  451년에 칼체돈에서 소집된 제4차 공의회에서는 오늘날까지 신조로 고백되는 그리스도 교의가 확정되었다. 그런데 이 교의는 사상사적(思想史的) 측면에서 볼 때 특정한 시기의 산물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이 교의는 3, 4세기에 지배적이었던 철학사상의 문제설정의 방향에 따라, 즉 실재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철학사조의 문제설정에 부응해서 강생한 성자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성부와의 본질 관계에 대해서 물은 것이다. 주어지는 해답의 성격이 제기되는 질문의 방향에 의하여 규정된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분위기에서는 예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 관심이 집중된 나머지, 예수의 구체적 언행과 그의 구세사적 의미가 완전히 망가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다지 중요치 않은 것으로 간과될 위험이 없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역사 속에 등장했던 예수라는 인물의 구체적 면모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그리스도 이해 양식이 예수의 인간성을 간과하지 않고 옹호하려는 데 있어서는 칼체돈 공의회의 입장과 원칙적으로 구별되지 않으나, 예수의 유일무이성을 규정하는 양식에서 그 차이를 드러낸다. 현대의 그리스도 이해양식은 예수의 유일무이성을 예수의 인간성 면모의 외부에서 추구하려 하지 않는다. 즉 예수의 신적(神的) 본성이나, 그의 선재적(先在的)인 하느님의 성자성 속에서 예수의 유일무이성의 근거를 찾으려 하지 않고, 예수의 인간존재 자체 안에서 추구하려 한다. 새로운 그리스도 이해양식은 예수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서 본질주의적인 그리스도 교의로부터가 아니라, 역사상의 구체 인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한다.
  이렇게 새로이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는 시도 뒤에는 사목적 관심이 작용하고 있다. 즉 현대인들 대부분이 처해있는 신앙의 상황이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다. 하느님의 부재 내지 침묵, 아니 하느님의 죽음이 일부 신학자들한테서까지 공공연하게 선포되고,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논란되는 오늘날의 사조(思潮) 속에서 하느님의 존재가 자명한 것으로 인정되었던 고대나 중세 사회에서처럼 불쑥 ‘위에서부터의’ 하느님의 둘째 위격의 육화강생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역전된 방법을 택하여 ‘아래에서부터’, 나자렛 예수의 인간면모로부터 시작하여 ‘볼 수 있는 것에서부터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체험과 함께 인간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정체를 파악해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아래서’ 시작하는 그리스도 이해 양식은 사목적으로 올바를 뿐 아니라, 신약성서에다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서에는 지상에서 생활하던 예수와 그의 복음선포 행위로부터 시작하여 십자가에서 일단 끝을 맺고, 부활 속에서 온전히 새로운 면을 드러내는 ‘아래서부터의 그리스도 이해’가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는 전통적 그리스도 교리들이 지상에서 생활하던 예수와 부활로 현양된 그리스도에 관한 성서증언으로 규정된 폭넓은 이해의 지평 속에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성서주석학의 역사비판적 방법에 의해 파악된 나자렛 예수의 인간적 면모 자체가 학자들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인격과 그의 행업을 둘러싸고 잡다하고 상반되는 견해가 대두되어 오늘날까지 신앙인들 사이에 혼란을 빚어내고 있다. 어떻든 나자렛 예수의 면모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착수된 ‘예수 생애 연구’의 결과로써 복음서들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예수의 전기(轉記)가 아님이 드러났다. 오랫동안 신앙인들은 4복음서를 참 인간이며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한 역사적 기록이며 증언이라고 믿어 왔었다. 그런데 이제 복음서에 기초하여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할 수 없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제 신약성서의 양식사학(樣式史學)의 통찰로 인해 복음서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한 역사적 기록이나 증언이라기보다 예수부활 후의 선포를 역사적으로 기록한 것임이 그리스도교계에서 인정받기에 이른 것이다. 복음서가 예수 스스로 말하고 행한 바와, 부활 이후에 사도들이 부활과 성령강림에 비추어 보다 깊은 이해를 가지고 전승한 바와 그리고, 교회의 상황에 따라 어느 부분을 선택 종합하여 분명히 하면서 그 가운데에서 복음선포의 형식을 보전하는 복음사가들의 펀집작업의 내용 등으로 이루어졌다는 양식사학의 견해는 오늘날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긍정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언 또한 다양하고 긴장에 차 있다. 공관복음서(마르코 : 60년대 말 로마에서 저술; 루가 : 70년대 말 아카이야에서 저술; 마태오 : 70년대 말 시리아에서 저술)는 선포하는 예수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예수가 말씀과 행적으로, 자신의 신명(身命)을 바쳐 선포하는 복음이 나타나고 있다. 즉 예수가 가까이 도래하였다고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 내지 다스림’(βασιλεία τού θεού),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내용이 서술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복음을 전하는 전권자가 자신을 높이 내세우는 일이 별로 없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믿는 신앙이다. 이에 반하여 요한복음서(1세기 말엽 소아시아에서 저술)와 그밖의 신약성서의 기록들은 선포하는 예수가 아니라, 선포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는 선포하는 예수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에 관해서 별로 언급이 없다. 그보다 예수 자신이 복음의 핵심이 되며, 이 기쁜소식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의 아들’(요한 20, 28)임을 믿는 신앙이다.
  예수의 모습을 그리는 이 두 가지의 관점과 방식은 신약성서 안에서 서로 잘 조화를 이루면서 병존하고 있다. 부활 이전의 예수를 선포하는 전승과 부활 이후에 선포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사이에 개재하는 긴장관계가 여기서는 그리 문제가 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긴장관계는 해명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를 어떻게 ‘주이며 하느님’(요한 20, 28)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예수는 과연 누구였는가?
예수에 대해 이와 같은 역사적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과학적인 정확성을 기해서 예수의 참 모습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이루어질 수 없다. 기실 ‘참 예수’는 우리가 역사비판에 힘입어 부활 이전의 예수의 생애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예수의 모습과 역사에 관하여, 특히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역사적 연구만으로는 밝힐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점도 역시 예수의 인격의 진상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에만 ‘참 예수’의 자취를 찾아낼 수 있게 된다.
  나자렛 예수에 고나한 역사비판적 회고의 문제제기는 교회의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신앙은 역사적 문제제기와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촉진하고 있다. 예수에 관한 역사적 질문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다’라는 근본신앙이 과연 예수의 현세의 생애에 근거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된다.
  이제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인정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소묘하는 가운데 그가 인간을 위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함축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면모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 나자렛 예수는 그리스도 신앙의 출발점이자 지속하는 근거이며 규범이다. 이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행동과 설교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수가 열심한 유다인으로서의 의무를 준수하고 회당과 경신예절에도 참여하여 기도했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는 당시나 지금이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소위 ‘경건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경건심은 당시의 경건하다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느껴질 만큼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다. 그는 혁명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고행자가 아니었다. 그는 부자들의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그는 ‘처먹고 퍼마시는 자’라는 욕을 먹어야 했다.(마태 11, 19). 그는 안식일 계명을 깨뜨리고, 준수해야 할 청결조문을 무시한다(마르 2, 13-17 ; 7, 1-23).
  예수의 혁명적인 면모는, 당시의 율법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하느님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 즉 죄인들과 상종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일찍부터 사람들은 예수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마태 11, 19)라고 멸시하는 말로 불렀던 것 같다. 여기서 죄인들이란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었던 세리와 창녀들뿐만이 아니라 목동들, 어부들, 도살자들, 욕장관리인 등 율법의 내용을 올바로 몰라 제대로 지킬 수 없었던 사회의 ‘변두리 인생’ 모두를 의미하고 있다. 이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준수로 인하여 가능하게 되는 의(義)의 길이 인정도리 여지가 없었다. 예수는 이 모든 죄인들에 대하여 멀리하거나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예수는 그들에게로 다가서며 그들과 함께 식사까지 한다. ‘경건한 자들’이 이 점을 두고 욕을 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다교 세계에서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함께 생활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타인을 근본적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요컨대 예수는 사회적, 종교적 인습(因習)의 성역을 무너뜨렸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경건심의 척도는 율법의 문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인간이 안식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었다(마르 2, 28). 바로 이러한 혁명적 태도로 말미암아 예수는 당시 종교계의 대표자들을 극도로 자극하여 그들의 반감을 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상식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혁명가는 아니었다. 예수는 기존하는 정치와 종교 세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열성당원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수가 가르친 도덕지침의 중심은 사랑이었다. 예수는 상처를 내려 하지 않고 치료하고자 하였고 그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폭락과, 폭력에 대한 폭력의 악순환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였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폭력을 포기할 것까지를 촉구하고 스스로 비폭력과 십자가를 지는 고통의 길을 걸어갔다. 이 행동으로써 예수는 일반적인 개념의 혁명보다 더 깊은 의미에서의 혁명가가 되었다.
  예수는 외적 사회 체제나 구조 그리고 드러나는 행동양식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범, 기본적인 방향설정 그리고 마음에까지 미치는 회개를 요청하였다. 예수가 보여준 전대미문의 태도는 다음의 물음을 제기케 한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마르 11, 28) 죄인들과 배척받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푼 예수의 혁명적 처신은 변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예수의 메시지 중심과 그의 실존의 본연의 근거는 ‘하느님 나라’ 내지 ‘하느님의 다스림’이었다. 예수는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라고 선포하였다. 공관복음서에는 이 ‘하느님의 나라’ 내지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말이 백여 번 등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생활의 중심이었다. 예수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느님의 다스림은 창조와 함께 주어지고 항상 존속하는 하느님의 세계 지배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가까이 다가온 사건으로서 완전히 실현된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자비를 뜻한다(마르 1, 15; 마태 12, 28; 루가 11, 20; 마르 14, 25; 마태 26, 29). 이 하느님의 나라 내지 다스림 개념은 예수에 의해 비로소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에게 이미 알려져 있는 것으로 전제되고 있고, 예수에 의하여 그 나름대로 해석되고 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는 예언자적이고 묵시문학적인 전통 속에 자리잡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구약 속에서도 가난하고 배척받으며, 박해받고 억압받는 자들, 즉 인간적으로 볼 때 아무런 희망을 지닐 수 없었던 자들에 의해서 귀중하게 받아들여진 바 있다. 예수는 구약성서의 희망을 포착하고는, 때가 되어서 약속이 성취되었노라로 선포한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가 임박했음에 직면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낡은 것과 결별하고 만사를 떠나 유일하게 필요한 한 가지의 것, 즉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이 하느님 나라는 법률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인간이 이룩하거나 도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위대함 자체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종말론적 잔치에 스스로 초청될 만한 완전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이를 친히 이룩한다. 인간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은 좋다(루가 18, 7 ; 마태 6, 23 ; 루가 13, 24 ; 마태 25, 1-13 ; 루가 12, 35- 37).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나라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할 수는 없다. 다만 어린이들처럼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고, 이를 위해 겨루며, 현명한 동정녀나 깨어 수직(守直)하는 동자들처럼 이를 준비하고 있을 수는 있으나, 선사하는 분은 하느님 자신이다(루가 8, 17 ; 12, 31 ; 13, 24 ; 22, 29 ; 마태 6, 33 ; 24, 44 ; 5, 3 ; 마르 10, 14).
  이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혁명적 면모가 보여주었듯이 죄인들과 신이 없는 것처럼 생활하는 자들에 대한 복수의 심판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구원사건이다.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의 설교는 하느님의 분노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나아간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 18-19). 예수는 이사야서(58, 6)의 내용이 나자렛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루어졌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바로 이를 행하는 존재임을 드러냈다. 이 소식은 위협과 멸망의 소식이 아니라, 구원의 희소식, 평화의 소식이었다. 이 복음은 산상설교에 의하면 이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희희낙락하는 자들에게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며,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위해 일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모욕받고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약속된다(마태 5, 3-12 ; 루가 6, 20-23). 예수의 말 속에 경고와 위협의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이것은 그 자체가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니며, 심판에 앞서 커다란 은총이 제공될 것임을 시사하는 말이다. 죄인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를 통해서 계시되었고, 이는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 된 것이다.
  요컨대 이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주권이나 왕국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하느님 나라는 오로지 하느님에게만 유보된 주권을 선포한다(마르 13, 32). 이 하느님의 나라는 ‘번개와 같이’(마태 24, 27)오지만, 인간들은 이것이 어떠한지를 모른다(마르 4, 26-29). 이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이 하느님임을 현시하는 것이며, 당신의 권능과 정의의 구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기대하고 희구하는 구원의 진수인 것이다. 그리고 도래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건을 인간의 사건으로, 인간의 사건을 당신의 사건으로 삼으신 것을 말하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에 직면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기 안전을 생각하는 기본태도인 지배욕과 소유욕을 포기하고 하느님만을 오직 하나의 확실한 의지로 맞아들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즉 인간에게 요청되는 것은 철저하게 새로운 생활 자세 곧 회개(悔改, μετάνοια)인 것이다. 회개란 예수가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의 부정적인 표현이다. 신앙이란 인간이 전적으로 달아들고 의탁하는 데에서 실천적이고 구체적이 된다.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충만하게 되기 위해서 자신을 비울 때, 하느님의 주님이심이 현시된다. 하느님 주권, 하느님 다스림의 도래란 인간이 하느님을 받들어 모시고 인정하는 가운데 그분의 주님이심이 드러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행한 기적들은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이라고 볼 수 있다. 기적 행위들은 자연과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해명하기가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성서주석가들은 특정한 기간 동안의 기적행위, 특히 병자치료와 구마행위들은 역사적으로 거의 이론(異論)을 제기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으로서의 기적들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서 완전하게 된다는 것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 그쳤지만, 예수는 단지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현세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기도 한 것이다. 예수가 행하는 기적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지금 여기에’ 도래한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 20)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예수가 직접 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예수의 인격(人格)과 사건(事件) 사이의 관련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는 그의 인격을 그의 사건과 합치시킨 것이다. 예수의 행위인 구마행위와 ‘하느님의 다스림’의 도래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역사(役事)와 그의 등장 속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도래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선포행위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확실히 역사적 예수의 말이라고 생각되는 산상설교의 제 1, 제 2, 제 4 명제는 이 점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옛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이르노니”(마태 5, 12. 27. 33)와 같은 예수의 말은, 예수가 유다이즘의 최고권위인 모세의 권위를 의문에 붙이고, 구약의 하느님의 말씀과 같은 차원에 자신을 내세우고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는 자신이 궁극적인 하느님 말씀의 사자(使者)라고 표방하고, 다른 사람들한테서는 남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쓰이는 ‘아멘’(Amen)을 자기 자신의 말을 위해 사용한다. “아멘, 아멘, 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는 예언자들처럼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자기의 말에서 거슬러 올라가 하느님의 말씀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의 말을 스스로 보증하고 있고, 구약의 권위보다 더 높은 자신의 권위로써 말한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선포방식은 자신이 독특한 권위의 소유자임을 웅변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말이 그 자체로 정당하고 진실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신성불가침한 하느님 말씀의 권위 자체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선포 전체에 대해서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전권을 받았음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전대미문의 엄청난 사실이다. 역사상 어느 인간에게서도 들어 본 일이 없는 유아독존적인 사명의식 내지 파견의식이다. 예수는 자신의 말과 하느님의 말씀을 동일한 위치에 놓음으로써, 예언자적 판단기준만을 깨뜨릴 뿐 아니라, 인간적인 판단기준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지상생활을 영위하던 예수의 이 전대미문의 주장은 제 4복음인 요한 복음에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진술과 통하고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 30).
  우리는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복음이 그의 인격과 일치함을 본다. 신약에서의 주요관심사는 예수가 자신을 누구라고 말하였는가가 아니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의미하는 바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구세사적 기능은 예수의 인격 자체와 일치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예수의 인격과 기능은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의 생애를 전적으로 성부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분께 대한 전적인 순종으로서, 그리고 인간을 위한 봉사로서 이해한다. 그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려고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그는 온전히 남을 위한 인간이다. 이처럼 그 자신의 인격은 사람으로 다스리는 하느님의 현존양식인 것이다.
  끝을 모르는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행하던 예수는 인간들로부터 버림받고 결국은 십자가의 죽음에 처해진다. 예수는 가련한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이들의 과실들을 용서하는 가운데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구원, 하느님 나라의 실재를 씨앗의 형태이지만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예수는 인간의 기본질서를 지양시켜 보다 높은 차원에서 완성시키고자 하였다. 예수의 이러한 의도는 인간과 하느님 관계에서 죄과와 형벌, 공로와 보상이라는 잔혹한 도식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완고한 법질서에 대항하고, 그대신 사랑과 은총의 법을 설정한 것이다. 소외된 사회질서의 책임자들이 예수의 이 복음과 사람의 실천행위에 반발하고, 예수를 증오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예수는 하느님 모독자로서, 그 당시 국사범에게 부과되던 십자가상 죽음에 처해졌다. 예수의 죽음은 소외된 현세 속에서 그의 복음과 사랑의 실천행위가 다다르게 된 역사적 귀결이었다.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충실하게 인간들을 남김없이 사랑했고, 소외된 세계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철저하게 자신을 동일시하였다. 예수의 남을 위한 사람의 순종행위가 십자가에서 끝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가 십자가상 죽음으로 완전히 끝장나고 종막을 고했다면, 그는 역사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의인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을 것이며, 그를 인류의 구원자이며, 하느님의 아들, 아니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는 결코 없었으리라. 그러나 예수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다. 그리스도 신앙은 에수의 부활이 발생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여기서 부활의 사실성 문제를 논할 수는 없다. 단지 바울로 사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부활의 사실성을 전제하기로 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 고린 15, 14).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으로써 죽음마저 수락했던 에수는 부활과 함께 자신의 정체를 온전히 드러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로써 사랑이신 하느님의 권능이 죽음의 세력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부활은 죽음의 한계를 폭파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예수의 부활은, 외견상 무의미하기 짝이 없어 보이던 삶을 살다가 죽음에로 치달렸던 한 어리석은 삶에 대한 하느님의 해답이었다. 역사 속에서 무모하게 보였던 예수의 헌신적인 삶이 바로 구원에로 이르는 현묘한 구원의 길임이 부활로써 확인된 것이다. 요컨대 한계를 모르는 사랑이 곧 구원의 실재임이 드러난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최후이자 궁극적인 사자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를 역사 안으로 이끌어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수를 거절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은 질겁하여 도주하였고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이로써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하느님께 대한 예수의 복음은 반박된 듯이 보였다. 십자가 위에서의 하느님 부재의 어두운 체험과 허약한 죽음의 절규는 예수의 생애가 무상에로 치달렸음을 드러내는 극치의 표징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부활은 하느님이 예수의 인간적 운명을 무의미하고 무상하게 방치하지 않고, 만사가 끝난 듯이 보이는 곳에서도 구원 가득한 완성된 세계로 돌파해 나갈 가능성을 소유한 분임을 드러낸 것이다. 죽음으로 인해 허무의 세계에로 밀쳐졌던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분으로서 하느님의 영광에로 들어올림을 받아, 자신의 인간적 전운명과 함께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가 된 것이다. 죽음은 예수를 이름없이 만들었는데, 부활은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 ‘예수는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시다’(요한 20, 29 참조).
  지상에서 생활했던 예수와 그의 행업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신앙의 규범으로 남는다. 이 예수의 역사와 운명의 중심은 십자가와 부활사건이다. 여기서, 선포하는 역사의 예수로부터 선포된 신앙의 그리스도로 넘어갈 수 있는 가교(架橋)가 놓이기 때문이다. 선포하는 예수와 선포된 그리스도 사이에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연속성과 비연속성이 동시에 개재되어 있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개재하는 동일성은 연역해낼 수 없는 새로움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부활 이전의 예수의 생애와 부호라 이후의 현양된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진술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궁극적 사자라는 전권을 가지고 등장했던 나자렛 예수가 부활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전권주장의 요청이 타당했음을 인지하게 된다. 우리는 정적(靜的)이고 존재론적인 개념의 범주로써 그리스도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하지 않고, 보다 역사적․약동적인, 즉 기능적이고 관계적인 개념범주와 사고 양식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면모를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우리는 예수의 존재를 그가 ‘아빠’라고 불렀던 하느님(성부)과의 긴밀한 인격적 관계 속에서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성부께 대한 사랑과 순명의 관계 속에서 성부로부터 직접 유래하면서 성부께 자신을 온전히 적응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그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성부를 위해서 모든 것이 되려고 함을, 자신의 순명적 삶,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는 순명적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예수의 존재는 이런 점에서 오로지 성부로부터 유래하고 성부를 지향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바로 이러한 가운데 남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현현(顯現)임을 보여주었다. 빈자와 죄인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은 성부께 대한 예수의 순종행위의 표징이었다. 이 사랑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르고, 성부에 의해서 완성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존재를 새로이 소생하게 하는 새로운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간으로서 온갖 유형의 부자유와 질곡을 끊고, 부활을 통해서 완성된 구원에 이른 분이다. 예수는 누구나 자신의 복음을 받아들여, 이 복음에 자신을 내맡기고 복음으로부터 생활하면 구원된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예수의 삶에 자신을 몰입하는 신앙의 삶이 곧 구원의 실재임을 예수는 부활로써 보여준 것이다. 부활신앙은, 자기 생명마저 고려하지 않은 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삶이 곧 구원의 삶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신앙이다.
  이와 같이 신앙이 사랑으로써 현실 안에서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이미 역사 속에서 단편적으로나마 소외상태가 극복된다. 이렇게 신앙 속에서 실재 자체가 다시 구원되고 온전하게 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가운데 모든 인간들에게 해당되는 바 인간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이 개시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느 것도 제외하지 않고, 어느 것에 의해서도 제약되지 않는 희망의 힘이다. 이처럼 예수의 부활은 엄청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부활신앙은 현재의 사랑을 이행해야 하는 과업으로부터 도피토록 하지 않는다. 부활신앙은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폭정에 대한 본원적 항거이기도 하다. 에수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은 현대인을 위해서도 보편적 구원에 대한 희망의 근거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체적 세계를 결정적으로 변형하여 구원하도록 이 세계에 개입한 인격 속에서의 새로운 자유이며 무조건적 사랑이며 희망으로서, 곧 인간의 구원자임이 현대세계에서도 신빙성있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가운데 세계 안에서 참으로 희망의 징표를 세워 놓는가 하는 문제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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