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한인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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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세계 안에서의 하느님 현존양식


  안녕하십니까?
  귀중한 주말 오후 시간을 할애해서 이 자리에 나와주신 여러분께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를 처음 뵙게 되지만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서 진지하게 알고 싶어하고 함께 토의하려는 여러분의 자세를 저는, 저와 같은 사람들이 지니는 자세와 같다고 보고 여러분 속에서 형제와 자매들을 보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느님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코끼리의 형체묘사와 관련된 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임금님이 태생 맹인 거지들을 불러모으고 그들 중에서 코끼리의 형체를 가장 잘 묘사하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의 맹인 거지는 코끼리의 다리를 만져 보고는 “코끼리는 나무기둥과 같은 동물이다”라고 하였고, 두 번째 맹인 거지는 코끼리의 꼬리를 만져 보고는 “코끼리는 밧줄과 같은 동물”이라고 하였고, 세 번째 맹인 거지는 코끼리의 귀를 만져 보고서 “코끼리는 야자나뭇잎과 같은 동물이다”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맹인 거지들도 이와 비슷한 말들을 하면서 모두 자기가 옳다는 주장들을 하고 있었고, 임금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의 주장을 듣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거나,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시는 분들, 아니면 다른 종교를 신봉하고 계시는 분들도 지금까지 하느님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왔고 들을 기회가 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스스로가 무한하지도 않고, 또 완전하지도 않은 존재인 줄을 아는지라 우리들의 인식능력이 무한할 수도 완전할 수도 없음을 알고, 그 때문에 우리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표상이 일방적일 수 있고 유한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만이 진실된 하느님이라는 의식(意識) 속에 생활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오늘 강연의 주제인 “현대세계 안에서의 하느님 현존양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도 천 사람이면 천 사람 다 각기 다른 해답을 가지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세상 안에서 발견하는 사물의 종류들과는 달리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천차만별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가능한 한 여러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신의 현존양식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노력하겠습니다마는 이 노력이 얼마만큼 여러분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말씀드리는 데 있어서 우선 현대의 성격에 대해서 고찰한 후에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 현존양식에 관한 이해를 간략히 소개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한 뒤에 끝으로 제가 여러 해 동안 생각하고 교단에 서서 하느님에 관해 말하면서 느끼는 바, 이 시대의 하느님 현존양식에 관해 가설의 형태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현대의 무신론적 성격

  먼저 정초(正初)에 발간된 신문에서 우리는 오늘날 새로운 장(場)을 맞이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유전공학(遺傳工學), 반도체(半導體) 공학으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의 과학기술시대는 한마디로 인간이 자신과 세계의 운명을 스스로의 손아귀에 집어넣고 인간과 세계운명을 조종해 나가는 시대임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연과학과 고도로 발달한 기술공학이 지배하는 현대는 한마디로 무신론적 세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인들은 창조주의 조물이라고 하는 자연세계를 신의 흔적, 신의 작품으로 대하기보다는 철저하게 이용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물론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나타남,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정의적(情意的)이고 신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연은 우리에게 매력과 외경의 염을 불러일으키는 실재였습니다.
  그러나 자연세계를 특정한 화학정식(化學定式)의 복합물로 파악하고, 이를 이용도의 관점에서 변환시킨 오늘날 신비적인 모습은 자연으로부터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숲이 울창해진 곳에, 강물이 흐르던 곳에, 바닷물이 넘실거리던 곳에 인간의 손이 미치면서 공장과 학교와 도로가 들어선 것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인간들은 신의 흔적을 느끼기보다는 자신의 위대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자연세계를 정복하면서부터 신은 불필요한 존재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들은 더 이상 신의 뜻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산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위한 이익과 목적의 관점에서 전세계를 보게 되자 이제 자연은 철저하게 인간을 위해서 기능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최대의 능률을 목표로 하는 이 고도의 산업사회에서는 인간의 이익이 고려될 뿐 신의 의지는 전혀 고려되고 있지가 않습니다. 여기서 신은 창조주로서의, 구원자로서의, 완성자로서의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신의 부재, 죽음, 침묵이 거론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하게 되었고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신앙인들도 이 사실을 이제 하나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지난 두 해 동안  이곳에서 있었던 강좌내용을 직접 들을 기회는 없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간접적으로 생명과학(生命科學)의 한계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던 어느 교수님의 강연 내용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전문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언젠가는 유전공학이 발달되어 열 명의 아인쉬타인이 탄생되고, 코끼리만한 돼지 생산도 가능하리라고 믿는 것을 비판적으로 본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이 문제를 신중하게 취급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신중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것과 복제(複製)생명체의 출현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는 기술공학의 발전 추세로 미루어 보아 언젠가 아인쉬타인같은 사람의 출현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지성을 가진 사람의 출현도 가능하고 또 히틀러 못지 않은 악인의 출현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인류는 스스로 이룩할 가능성을 명확히 헤아릴 수 없는 불투명한 상황으로 이미 접어들고 있습니다. 「제 3의 파도」(The Third Wave)의 저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60년도 후반기에 선진국에서 제1차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제2차 혁명이 발생했다고 보고 이것이 인류문화의 세 번째 파도로서 앞으로의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예견하고 있으며, 저도 이 견해에 동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늘의 세계는 그 전모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거의 무한의 경지에로 인간들이 그 능력을 과시하고 있는 처지에 접어든 것처럼 보여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의 조종능력은 생명의 신비에로까지 미치고 있고, 외계로는 우주를 정복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의 무한성에 긍지를 느낀 나머지 자신을 신격화, 우상화하는 일이 있음에도 과히 놀라지 않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들은 노력 여하에 따라 과거에는 오로지 신만이 이룩할 수 있다고 여겨지던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도로 발달한 과학과 기계기술이 지배하는 오늘의 사회가 지상낙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문명의 업적이 휘황찬란하면 할수록 인류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그 이면(裏面)이 더욱 비참하고 어둡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0월 세계 식량의 날에 즈음해서 발표된 국제연합식량 농업기구의 사무총장의 보고서 내용에 의하면 1900년대에 15억이던 인구가 1975년에 40억으로 증가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중 1백분의 1에 해당하는 4천만 명이 매년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것도 그 중의 절반이 어린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인구 증가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2000년대에는 60억으로 늘어날 것이고 그 가운데 7억 5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현재도 40억 인구의 4분의 1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고 팔억 인구가 상대적인 빈곤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1분마다 1백만 달러의 비용이 군비 확장에 투입되고 있다고 그는 보고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오늘의 세계가 안고 있는 불의와 부조리 그리고 비리(非理)의 한 면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과학과 기계기술문명이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의 자유신장(自由伸長)에 기여하는 방향으로만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왜소화시키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사회의 비인간현상이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인간이 인격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특정한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고 그 때문에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언제라도 대치될 수 있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회의 산업화와 함께 대두된 각종 문명질환, 공해출현, 자원의 고갈 등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이룩할 성장의 한계를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단된 나라에서 비운을 겪어야 하는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있듯이 동서 이데올로기의 긴장관계가 현대인을 괴롭히고 있고, 경제적으로 선진국인 소위 북반구에 속한 나라들과 경제적으로 낙후된 남반구의 후진 약소국들 사이에도 긴장과 마찰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를 달리하는 여러 민족들의 갈등, 전체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억압으로 말미암은 사회적인 불안 등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가 구원된 세계가 아님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유례없는 가능성, 즉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지금까지 이룩한 모든 업적을 순식간에 초토화할 수 있고, 모두 파괴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5년 전에 끝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은 현대세계의 이러한 양면성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오늘날과 같은 재화와 능력과 경제력을 누려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렇지만 세계 인구의 상당한 수가 기아와 빈곤에 신음하고 있으며 문맹자도 없지 않다. 인간이 오늘과 같이 강한 자유의식을 가져 본 일도 일찍이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내지 심리적 노예화의 새로운 형태가 대두되고 있다. 세계는 필연적 연대성을 가지고 서로 성숙되어 하나를 이루자는 의식을 생성하면서도 서로 싸우는 힘의 대립으로 극도의 분열을 자아내고 있다”(사목헌장 4항). 이처럼 강하면서도 약하고, 최대의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최대의 악을 자행할 수도 있는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 인류는 거듭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인간 자신의 진로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운명이, 세계의 운명이 바로 인류의 수중에 들어 있다는 의식이 팽배하게 되면서, 이 세계를 완전한 상태로 이끌어 간다는 신의 가호와 섭리에 대한 신앙은 점차로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이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최소한의 상태로 줄어들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이 생명의 주님으로, 구원자로 그리고 이 조물세계의 완성자로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것은 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그분의 진리를 목말라하는 모든 구도자들이 함께 구명해야 될 문제입니다. 이제 역사(歷史)의 현상 속에서 제시된 하느님 현존양식의 제이해유형(諸理解類型)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하고 이 이해유형의 문제점들을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하느님 현존양식의 이해 유형

  하느님은 인간의 감관(監官)을 통해 직접 그 존재를 파악할 수 없는, 볼 수 없는 실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물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완성으로 이끄시는 분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학술적인 표현으로 하느님은 ‘만물은 규정하는 실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경건한 신앙인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만물을 규정하는 실재로서의 하느님을 전능하고 전지하며, 완전하고 무한하고 불변한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언제 어느 때라도 인간사 및 세상사에 간여하시어 선의 상태로 나아가도록 이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현존하시는가를 두고 아직 지성이 계발되지 않은 몽매했던 고대의 원시적 인간들과 현대의 지성인들 사이에는 이해표상(理解表象)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능이 계발되지 못했던 단계의 원시인들은 하느님이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하늘 어딘가에 계신다고 믿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고 알고 있는 성서의 표현들이 바로 이러한 의식의 수준에서 씌어진 기록들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 세계를 삼분화해서 생각했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이 거처하는 지상세계 그리고 악마와 악신들과 악한 영혼들이 머무는 지하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왕이신 하느님의 어좌 주위에 천신들이 두루 옹위해 있고, 선량한 삶을 살았던 성인 성녀들이 그 주위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양식을 우리는 오늘날 바로 ‘우리 위에 있는’, ‘우리 위에 계신 하느님’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고 주의 기도문에서 표현되는 양식이 바로 이러한 현존양식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네! ‘우리 위에 계신 하느님’이 바로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하느님의 현존양식이었습니다.
  자연의 문제와 인간의 문제를 철학적인 차원에서 사유하기 시작한 중세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하느님을 인간의 모습을 한 존재로 의인화할 수 없었고, 그리고 공간적으로 요원하게 떨어진 피안자로 생각하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피안자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사람들은 하느님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창공에 거처하시는 의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경계 피안에 거처하시는 정신적인 존재로 이해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이해된 하느님의 현존양식은 ‘세계의 피안’, ‘우리의 이 피안’에 존재하시는 절대자로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유단계에서 하느님은 이제 더 이상 천상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피안에 계신다고 보았습니다. 여러분중에는 신존재증명과 관련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 대해서 들으신 분도 계시리라 생각되어집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피안적인 실재로서의 하느님을 감관을 통한 인간 인식과 인간 지능으로는 직접 파악할 수 없고, 지상에서 발견되는 유한한 조물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다섯 가지로 신존재증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지상에서 발견되는 일체의 변화와 운동의 현상을 주목하고, 이러한 운동이나 변화가 있기까지에는 이것을 가능케 한 동자(動者)가 있으리라고 추론하고, 자기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유한한 존재들을 움직이게 하는 존재를 부동적 동자(不動的 動者)라고 부르며 이를 우리 모두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이 세상 안에서 발견되는 크고 작은 모든 결과들을 보고 이러한 결과들은 있게 한 동인(動因)을 추적해 가노라면, 자기 자신은 결코 남에 의해서 작동되지 않으면서 다른 존재 내지 사건의 원인이 되는 제1원인이 있음을 추론할 수 있는데 이 제1원인이 바로 우리가 부르는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 자신과 다른 인간들을 포함한 유한한 조물들이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사실에서부터 이러한 존재자들은 우연적인 존재자임을 말하고, 이와는 달리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필연적인 존재가 요청되는데 이 필연적 존재가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네 번째로, 이 세상에서 발견되는 존재의 등급을 보고, 말하자면, 무기물과 유기물, 식물과 동물, 인간 등에 이르는 존재의 등급을 보고, 이들 중에서 최고 존재자를 상정할 수 있는데 이 최고존재자가 곧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 발견되는 갖가지 질서를 보고 이 질서를 있게 한 지성적 설계자(知性的 設計者)를 추론해내고서 신이 바로 이 지성적 설계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부동적 동자, 제1원인, 필연적 존재자, 최고 존재자, 지성적 설계자로 지칭되는 이 하느님은 이 세상 안에 직접 거처하지 않고, 피안자로서 거처하시되 필요하실 때마다 시시로 이 세상사에 관여하신다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세상 안에서 발생하는 길흉화복이 하느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 현존양식이 오늘날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역사 속에서 체험하는 고통에 대한 문제를 앞에서 설명된 신의 현존양식이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사실상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실존적 상황은 고통으로 규정될 수 있고 이런 점에서 불교도들의 고통에 대한 통찰은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세상에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다 고통이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가끔은 이 세상 안에서 긍정적이고, 보람되며, 의미있는 순간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자신의 삶이, 그리고 우리가 처해 있는 우리 민족의 삶이 행복보다는 고통 속에서 영위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인류가 처한 상황이 소외된 상황이라는 것을 수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옛부터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이 고통을 인간들이 스스로 범한 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본시 이 자연세계를 선하게 조성하셨으나 인간이 자유의지를 그릇되게 사용함으로써 불행을 자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자행한 죄과를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실상(實狀)과 꼭 부합하지 않음을 우리는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유한함을 알기 때문에 크고 작은 과실을 범하고 있음을 시인합니다. 그러나 한사람이, 또는 한 집단이 처해 있는 상황은 그가 범한 죄과와는 비교가 안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의 과실 없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구조악(構造惡)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면서부터 고통과 악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 무죄한 고통은 내세에 가서 보상된다고 하는 이 전통적인 교리의 입장이 그렇게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죄하게 고통당하는 어린이의 처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강도에 의해서 무고하게 살해되거나, 불치병에 걸려 삶의 기쁨을 채 맛보기도 전에 쓰러져야 되거나, 아니면 단지 특정한 민족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가스사용실에서 숨져 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한 채 그 뒤에 모든 것을 올바로 돌려놓겠다고 하는 이 신이 과연 전선(全善)한 분일까에 대해 회의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만일 여러분에게 사랑하는 자녀가 있다면, 그 자녀가 어떤 힘센 소년이나 혹은 난폭한 어른에 의해서 구타당하거나 죽음의 고통에 처해지고 있을 때 즉시 가서 말리겠습니까, 아니면 끝까지 방관하고 난 후 그 아이가 숨진 다음에 가서야 그 아이를 살려내려고 애쓰며 그 아이를 고통스럽게 한 사람을 처벌하시겠습니까?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누구나 무죄한 자녀가 고통당하는 바로 그 순간 즉시 동참하게 마련일 것입니다. 인간에게 바로 이러한 인도주의적인 의식이 성장하게 되자 악과 고통의 처지를 방관한  후 내세에 가서야 보상해준다는 신에 대한 저항과 반항이 일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고통과 불의가 감소되기는 고사하고 이 역사 안에 그대로 진행되는 현상을 목격한 인간들이 신은 죽었다고 절규를 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전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여기 개입해서 이 사실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그는 방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전선한 분이 아니거나, 아니면 전능한 분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고 죽은 존재다”하는 선언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이 과학기술시대를 사는 현대인들 중에서 하느님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저 구름 위에 거처한다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피안세계에서 고고하게 이 세상에 발생하는 일을 관망하시는 하느님이거나, 이 세상 안에서 발생하는 악과 고통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거나 무력한 신을 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점차 감소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몸담고 생활하는 이 세계가 신이란 존재 없이도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세계가 신 없이도 스스로 해설될 수 있다고 보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세계를 해설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이런 통찰은 이미 프랑스 혁명시대, 프랑스 혁명 당시에 체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796년 프랑스의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라플라스(Pierre- Simon laplace, 1749-1827)는 당시의 수석집정관이었던 친구인 나폴레옹에게 「세계 체계의 해설」(Expostion du Système du monde)이라는 자신의 책을 기증한 바 있습니다. 이 작품은 획기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작품을 다 읽은 후 라플라스에게 그 책의 내용 중 세계에 대한 설명이 매우 위대하다고 칭송하면서 아울러 “나는 이 책에서 하느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였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때 라플라스는 “나는 이 가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Je n󰡑avais pas besoin de cette hypothése!)라고 대답했습니다. 의식적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을 깊이 관찰하면서 천상계에 존재하는 신이거나, 세계 피안자로서의 신이거나 이제 이런 신의 존재는 무력하고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점차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신의 존재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세계내적인 요인들입니다. 즉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요인들이 중요시될 뿐, 신은 이 세계 안에서 의미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위해서 하느님이 필요치 않습니다. 사회적인 삶의 안정을 위해서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서, 군사적인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필요치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네! 그 때문에 이제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신학자들 스스로가 하느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사신신학(死神神學)을 전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느님을 추구하고 갈망하시는 여러분! 이제 여러분들께서 믿으셨던 그 하느님이 앞에서 말한 우주론적(宇宙論的) 의식수준의 차원에 머무는 하느님이라면 그분을 포기하십시오. 그러한 신은 돌이킬 수 없이 죽었습니다.

  하느님을 질서정연한 이 세계의 창조주로, 주재자로, 완성자로 믿고 있던 시대가 서서히 종말을 고하면서 인간들은 의지(依支)의 상실을 체험했습니다. 지금까지 유사 이래 자명하게 믿고 의지해 왔던 일체의 객관적 권위(客觀的 權威)가 붕괴되면서 인간들은 객관적인 질서일반(秩序一般)에 대해 회의와 불신을 표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 세상 안에서의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고, 자신들이 의지할 수 있는 근거와 기반을 새로운 각도에서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더 이상 의심 없이 확고한 기반을, 바로 만사를 회의하는 자아 속에서 찾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소위 ‘사고(思考)의 인간학적 전환’이란 이런 사실을 두고 한 말입니다. 객관적인 질서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했던 인간은 바로 회의하는 자신을 발견했고, 이 회의가 의심할 수 없는 현상임을 감지하고 “회의하기 때문에,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세계질서 속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키려던 자세로부터 변화된 자세를 표명하고, 만사를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자신의 존재로부터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이 인간학적 전환, 주체의 각성이 현대 제자연과학의 발달을 가능케 했고, 민주주의 운동 및 인권운동을 가능케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가 불완전함을 깨닫게 됩니다. 회의한다는 사실이 바로 이러한 불완전한 존재임을 노출하고 있고 이 불완전한 존재가 어디서 연원하는가를 사람들은 사유하기 시작하였고 이와 같은 재정립과정에서 신이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회의하고 사유하는 인간은 ‘명석판명한 관념’(idea clare et distincta) 즉 객관적으로 포착되는 명석판명한 관념이 확실하게 존재한다고 보고, 이 명석판명한 관념중에 신관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나 자신이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서 내 앞에 존재하는 여러분들 모두를, 그리고 내 앞에 발견되는 사물들의 존재를 다 회의하고 난 후 내 머리속에는 칠판의 관념이, 꽃의 관념이, 사람의 관념이 자리잡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칠판의 관념이 어디로부터 연원하는가? 꽃의 관념은 어디로부터 연원하는가? 내가 이들의 존재를 모두 회의하였기 때문에, 그 주역이 나이기 때문에 이들의 관념이 생겼다면 이들의 관념의 근원은 바로 나다.
  그런데 내 안에는 이러한 유한한 실재에 대한 관념 이외에도 생득관념(生得觀念, idea innata)들이 있으며 이들 가운데 신(神)관념이 있다. 그리고 이 신관념이라면 완전하고 무한한 실재를 지칭하는데 이 관념은 어디로부터 연원하는가? 이 완전하고 무한한 관념의 근원이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인 나일 수는 없다. 나는 스스로 불완전하고, 그러므로 회의하는 존재이다. 그렇듯이 회의하는 내가 완전한 존재관념의 근원일 수는 없다.“ 여기서 이 무한한 존재관념은 바로 신 자신으로부터 이입된 것이라는 통찰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는 신이 어떻게 현존하게 됩니까? 지금까지는 천상세계에서 그리고 피안세계에서 존재한다고 믿었던 신이 바로 내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 ‘내 안의 타자로서의 신’, 즉 만사를 회의케 하고 인간 자유를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단계에서의 신은 ‘내 안의 타자로서의 신’ 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은 회의하고 사유하는 나의 삶을 가능케 하는 타자로서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소위 ‘하느님 내재의 체험’이 이루어지고 천상세계와 피안세계에 거처한다고 믿었던 신이 이 세계 안에서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하는 근거로서의 신으로 인간 안에서 요청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신체험양식은 이미 고대로부터 동서의 신비가들이 체험한 바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무한한 존재인 신을 외부세계에서가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체험했고, 이에 따르는 삶을 수도 생활로서 구체화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적빈의 삶 속에서 충만의 삶을 맛보는 역설적인 희열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인간학적 전환을 이룩한 후의 인간들의 사회는 신의 내재를 믿는 사람들과 인간위주의 삶을 사는 사람들-두 이념의 부류로 분리되게 됩니다. 이것이 포이에르바하나 마르크스(K.Marx, 1818-1883)로 이어지는 인간과 현세위주적인 무신론자들의 등장을 가능케 했고 세계 안에서의 하느님의 내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출현을 가능케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인간존재를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규정되는 여기서도 문제는 대두됩니다. 여기서 하느님은 더 이상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사유하고 행동할 때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요청됨으로써 다시 한 번 주객의 전도가 이루어집니다. 이제 세계 안에서 인간이 주인의 위치를 점하게 되고 하느님은 이를 가능케 하는 요청이 되는 객체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문제시해야 될 것은 이렇게 개개인간들의 삶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규정된 신이 인류와 세계 전체의 운명을 보다 완성되고 개선된 상태로 이끌어 가는 데 무력하다면 이런 신이 과연 ‘하느님다운 하느님’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이로써 소위 인간학적인 전환을 이룩한 초월신학이라든지 실존신학의 문제가 60년대 이래에 소장 신학자들에 의해서 지적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70년대 이후의 그리스도교 신학계에서는 하느님을 개인의 차원에서 구원을 가능케 하는 분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이 세상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사건을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분으로 파악해야 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런 점에서 이 하느님을 ‘우리 앞에 계시는 하느님’이라고 부르자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를 서너 번 방문한 바 있는 소위 ‘희망의 신학’, ‘정치신학’의 주창자인 몰트만같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하느님이 바로 이런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개개인의 삶을 가능케 하는 분이 아니라, 바로 자연과 인간사회 그리고 개인을 앞으로 이끌어 나가는 새로운 것을 가능케 하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파악된 하느님은 우리 앞에 현존하는 하느님입니다. 몰트만과 그의 지지자들은 “종래의 신관은 과거지사에 집착해 있고 결과적으로 소외되고 분리되어 있으며, 비인간적인 세계를 정당시하는 데에 기여했다. 한마디로 신은 반동적인 세력의 근거로 타락되기에 이르렀는데, 이제 우리는 하느님을 만인에게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줄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약속하는 하느님으로 파악해야 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몰트만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신학자들이 이제 하느님을, 이 세상 인간들의 운명에 방관의 형태를 취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 세상사에 직접 간여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으로 이해할 때에 당연히 수긍해야만 하는 통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현존양식의 변화가 이루어져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무한하고 전능하며, 영원하고 불변한 분으로 그리고 인간과 세상사에 대해서 동참하기보다는 초연하게 방관하시고, 이 세상 끝나는 날에 가서야 당신의 모습을 위엄있게 드러내리라는 재래의 신표상(神表象)의 문제성이 지적되고, 하느님은 그러한 방관자가 아니라 이 역사의 운명에 동참하시는 분이라는 본시의 그리스도교적인 성서적 신표상이 어느 새 신학계에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분이 인간사에 개입하면서 고통당하는 인간의 운명에 동참한다는 사실을 묘사하는 신학작품 등을 대할 때 전율을 느낍니다. 참으로 이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죽음과 고통의 운명을 겪으신다는 이러한 표현들이 일단은 우리를 깊이 감동케 합니다.

  그러나 나는 좀더 냉정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규정하면서, 그분이 이 세상사에 직접 간여하시고 세상의 운명에 동참하신다는 이런 이해들이 인간의 처지를, 그리고 이 세상 조물의 처지를 과연 얼마나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분이 바로 사랑 자체이시다”하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분이 과연 이러한 세계를 어떻게 합리화하실 수 있겠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해야 될 경우를 많이 목격하고 체험하게 됩니다. “과연 기아로 사망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어떠한 형태로 현존하시는가” 그들의 운명에 동참하신다는 사실 한 가지로 무죄한 고통이 보상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는 한 인간으로서 일을 해야 하는 동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휴식을 해야 하고 수면을 취해야 하는 정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사랑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곳에 하느님이 생생하게 현존하신다는 것을 논증적 증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관의 통찰로서 받아들이지만, 그와 다른 현상도 내 실존 속에서 발생하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일상사로부터 벗어나서 휴식을 취할 때, 기도를 할 때 내 앞의 하느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하늘 위에서 나의 모든 운명을 돌보아주시는 분으로도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고독 속에서의 신의 현존양식입니다.

    3. 존재와 무(無)로서의 하느님 현존양식

  이런 이유로 나는 ‘존재와 무로서의 하느님 현존양식’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존재라고 볼 때에 스스로 인간에 의해서 헤아려질 수 있는 존재자와는 달리 이러한 존재자들, 즉 사람이나, 나무나, 하늘이나, 새나, 산 같은 존재자들을 있게 하는 근거이고, 이들 존재자들 속에서 자신을 나타나게 하는 창조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유한한 존재자로서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고, 앞으로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지금 살아 있는 중에도 내가 처해 있는 그 무(無)의 세계의 심연을 느끼고 전율하는 순간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속했던 무의 세계로부터 와서 무로 둘러싸여 결국은 무의 심연으로 빠지게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바로 신의 현존양식과 관련시켜 생각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신이 참으로 만물을 규정하는 실재라면, 나는 존재와 직결되고 있는 이 무와도 존재론적으로 관련이 되어야 한다고 믿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무의 세계를 즐겨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가 비존재상태로부터 존재상태로 접어들고 그리고 시시각각 비존재의 위협을 받으며 결국은 비존재의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만물을 규정하고,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는 그 하느님은 바로 이 무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통찰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왜 내가 신은 무로서 존재한다는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졌는가 하면, 역사를 통해 이 세계 안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무죄한 고통의 발생을 지켜보면서 신은 거기서 이를 개선하고 변혁하는 전능한 분으로서가 아니라 무력하기 그지없는 무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통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충격적인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집에서 딸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어느 가정주부가 집안에 들어온 외간남자에 의해 겁탈을 당하고 살해된 사건에 관한 기사입니다. 그때 나는 의문을 제기했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분이 아니 계신 데 없이 곳곳에 계신다면 그 순간 신은 어떤 형태로 현존하고 있었던가?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신은 무의 형태로, 무력하기 그지없는 실재로 그곳에 존재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영어의 표현이 이 신의 무의 성격을 해설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나름대로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물이 아니다’(God is nothing)라는 말입니다. 사물이라면 인간에 의해서 파악되고 헤아려질 수 있는 것인데 그 신은 헤아려질 수 없는 ‘무엇’입니다. 그러면서도 신은 우리들의 삶에 직접 관련이 되는 실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그대로 직접 대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무의 현존을 체험하는 순간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도들은 그들이 수행을 통해서 이르게 되는 무(無)가 결코 텅빈 공허가 아니라 그들을 열락의 경지로 이끌어 가는 충만의 상태라고 보고 있지만, 아까도 예를 들었듯이 무력하기 그지없는 공허한 형태로서의 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발생한 지성으로 파악할 수 없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원인, 즉 조물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 무가 허무로 끝나지 않고 완성의 상태로 나아간다는 것을 동적인 신의 계시인 육화된 신의 모습을 통해서만 오로지 믿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현존이 인간의 삶의 조건에 상응해서 동적인 양식으로, 그리고 정적인 양식으로 발생한다고 보고 있으며, 동적인 현존양식으로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제시할 수 있고, 정적인 현존양식으로는 이 무의 형태로 나타난 신의 현존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가는 지금으로서는 여러분들에게 제시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위해서 현존하다가 죽었으나 부활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존재와 무로서 나타나는 하느님을 우리의 희망의 대상으로 말한다면, 하느님은 우리 앞에 계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신이라는 작업가설(作業假說) 없이 생활하도록 내버려두면서 바로 그러한 가운데 우리 앞에서 현존하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독일의 신학자였던 본훼퍼(D. Bonhoeffer, 1906-1945)의 표현처럼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서 바로 피안자로 머무는 그러한 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피안자로 머무는 분’-이분이 우리를 존재케 하였고 우리들을 무의 상태로 방치시키면서 죽음과 부활의 도정을 거쳤던 그리스도와 함께 완성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듯이 저나 여러분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는 하느님 앞에서의 가난한 구도자들입니다. 저는 지난해에 “신관(神觀)의 어제와 오늘”(이 책, 1장)이라는 글을 가톨릭 신앙인을 위한 「사목」잡지에 4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끝으로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역사 속에는 질서와 조화뿐만이 아니라 무질서와 부조리, 그리고 갖가지 재난도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적이고 양극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세계 안에서 하느님은 어떤 의미로 창조주요 구원자요 완성자로서 인격체일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이 모순적 사건들과 존재론적으로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하느님이 항시 조물을 위협하고 죽음 속에서 자신을 관철하는 무의 세력과는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하느님의 실재에 대하여 사유해야 하는 모든 구도자들이 간단히 지나쳐버릴 수 없는 문제점들이다”라고 말한 뒤 “계속적인 순례의 도정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보다 분명한 해답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자세로 이 글을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지난해 나의 일상사로부터 벗어나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난 오늘 역시 일 년 전이나 별다름 없이 가난한 구도자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대로 나는 어렸을 때 지녔던 하느님에 대한 소박한 신앙을 버려야 되고 존재와 무로서 우리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하느님을 담담하게 다시 언어화해야 된다는 필요성에 접하게 되었고 이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 여러분들의 협력과 동참을 청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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