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한인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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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아카데미이메일로 투고를 요청하는 글이 있어서 올립니다.

마리아의 동정성

1. 문제제기
항간에는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종교’라든가, ‘같은 그리스도교지만 신교(新敎)는 예수교이고 구교(舊敎)는 마리아교다’라는 말들이 오가는 모양이다. 이러한 세평(世評)이 가톨릭 교회를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온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렇다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라고 일축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오해가 생겨날 근거가 가톨릭 교회내에 전혀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요인은 성당에 처음 발을 들여 놓는 사람에게 쉽게 감촉되는 것으로 제단 중앙의 십자가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마리아상이 자리잡고 있음을 거의 예외없이 ! 발견할 것이다. 이 마리아상들은 대개 아름다운 모습으로 홀로 서 있거나, 아니면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인자한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그 둘레에는 갖가지 꽃들과 초들로 장식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마리아상 앞에서 머리 숙여 기도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아(高雅)한 마리아의 모습에 매료된 나머지 정작 봐야 할 가슴에 안겨 있는 아기 예수를 보지 못하는 수도 있다. 이러한 때에 사람들은 예수에게서보다 마리아에게서 더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 있으며, 예수의 존재보다 마리아의 존재가 더 의미깊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마리아 공경은 각별하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이 하느님을 공경하듯 마리아를 ‘흠숭지례’(欽崇之禮)로써 공경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경지례’(上敬之禮)로써 다른 어느 성인 성녀께 드리지 않는 각별한 공경을 드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인간에게는 수여될 수 없다고까지 느껴질 ‘하느님의 모친’, ‘교회의 모친’, ‘세상의 모후’, ‘천상의 모후’(Regina caeli)와 같은 갖가지 칭호로 불리우고 있다. 또한 많은 신자들의 의! 식 속에는 마리아가 구세주 그리스도와 같은 구속자(救贖者, Corredemptrix )이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仲保者, Mediatrix)라는 상념(想念)들이 자리잡고 있다. 세계 어디서나 마리아를 본명으로 택한 사람들을 부지기수로 대하게 되며 마리아를 주보로 하는 교회, 수도회, 교육기관, 신심단체와 사회사업체 등을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점들이 마리아 신심의 열성도를 짐작케 한다. 금세기 마리아 공경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교황 비로 12세의 재위기간 말기인 1950년대에는 ‘성모성년’(聖母聖年)이 선포되었는가 하면 각종 마리아 단체와 대회 등이 소집되거나 결성되었다. 1954년 한 해에만도 무려 43개의 대회가 마리아를 주제로 하여 개최된 바 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마리아 공경열이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좀 줄어든 것 같지만 우리 한국에서는 변함없이 지속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레지오 마리에, 푸른 군단, 매괴회 등 마리아 신심단체의 활동들이 괄목할 만한 추세로 계속 발전되어 나가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가 되겠다.
이러한 제반 현상들이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의아스럽게 나타날 수가 있다. 자연과학과 기계기술이 지배하는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무의식 중에 비합리적인 일들에는 불신감을 표명하게 된다. 이들에게는 2천년전 유다의 한 고을에서 살았던 마리아라는 한 여자가 처녀의 몸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출산하여, 인류를 구원하는데 이바지하였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을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을 동정녀인 하느님의 모친이라고 공경하는 신앙 또한 이율배반적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비판적인 비신앙인들에게 계시진리를 선포하고는 ‘받아먹거나, 아니면 죽어라!’라고 말하는 식의 계시실증주의의 태도를 취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무조건적인 추종을 요청하는 맹목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우리는 신앙을 거슬러 제기되는 반대논증들을 신중히 검토하여, 이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신앙의 진실성을 신빙성있게 제시할 수 있도록 요청받고 있다. 특히 비신앙인들에게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소지를 안고 있는 문제일 때 더욱 그러하다.
이 글에서는 마리아의 중심교리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반대논증의 성격을 일별(一瞥)하고, 반론제기와 함께 대두된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하며,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어떻! 게 천명해야 할 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비신자들로부터 직접 논란 되는 동정녀이며 하느님의 모친이라는 교리와 관련되는 문제점들만을 집중적으로 취급하고, 성모무염시잉모태(聖母無染始孕母胎)라든가 성모몽소승천(聖母蒙召昇天)과 같이 가톨릭 신앙자체내에서 논란되는 교리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2. 마리아의 동정녀 출산에 대한 반론
가톨릭 교회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탄생하였다고 가르친다. 초세기부터 신앙고백은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탄생하였다고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마리아의 동정성은 마리아라는 이름과 동의어가 될 만큼 자명한 사실이었다.
마리아의 동정성은 마리아의 하느님 모친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두 교리는 서로 분리된 채 관계가 없는 교리가 아니라, 하나요 전체인 마리아 실재를 핵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하고 출산하였다는 신앙고백은 비신자들에게는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있을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사실 이 신앙고백은 계몽주의의 대두 이래 강력하게 의문시되어 왔으며, 오늘날? 〈?이 교리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기묘하게 해석하는 신학자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동정녀 출산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반론은 먼저 자연과학적 입장으로부터 제기된다. 자연법칙의 입장에서 볼 때에 남성과의 결합없는 여성 혼자만으로의 단성생식(單性生殖)인 동정녀출산(Parthenogenese)이란 인간과 가능의 경우에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신앙이 주장하는 바는 이러한 자연과학적 관점에서는 그 사건이 사실로 입증될 수 없는 하나의 기적설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반론은 종교학으로부터 제기된다. 종교학자들은 이러한 기적적인 출산관념은 고대세계에서는 널리 퍼져 있었으며, 신약성서가 씌어진 주변세계, 예컨대 에집트와 그리스 지방에서도 역시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성서기자들이 이러한 기적출산 관념을 이용하여 그들의 목적에 맞도록 변형하였음을 쉽게 인지(認知)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미 구약성서가 이사악과 야곱 그리고 사무엘 등과 같은 위대한 인물들의 출생시에 하느님의 특별개입을 보도하고 있으며, 신약성서도 이 도식을 따! 라 세례자 요한의 출생시에도 하느님의 특별개입이 있었음을 보도하고 있다 는 것이다. 이처럼 요한의 탄생시에도 하느님이 개입하였다고 보도했다면, 예수의 탄생시에는 그와는 비교가 안될이만큼 더욱 절대적이고 강력한 하느님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라고 표상하기란 어렵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보도는 자의적(字義的) 생물학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하나의 신화론적 진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 반론은 성서해석학 자체로부터 제기된다. 즉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의 ‘예수의 동정녀 출생’이라는 이 결정적인 사건이, 신약성서 안에서는 단지 두 군데에서만 보도될 뿐이라는 것이다. 신약성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바울로 서한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한 ‘여인’으로부터 탄생하였다는 보도가 한 번 나오기는 하나, 이 ‘여인’이 마리아라고 직접 지칭되고 있지도 않으며 또한 그 ‘여인’이 동정녀임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갈라 4, 4 참조.). 마르코와 요한 복음 및 다른 서한들에서는 동정녀 탄생이 전혀 거론되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마태오와 루가복음서에서조차 요셉과 마리아가 그저 ‘예수의 부모’라고만 일컬어지는가 하면(루가 2, 27. 41. 43. 48),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를 ‘요? 좇?아들’(루가 4, 22 ; 요한 1, 45 ; 6, 42 참조), ‘목수의 아들’(마태 13, 55)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들이 예수의 동정녀 출생을 미심쩍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의 동정녀 출생 교리는 역사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실(史實)로서 이해하기보다는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 대두되고 있다. 「화란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인간적 출생과 함께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함도 보여주고 있다…예수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모든 아기들 중에 최고봉의 아기였다. 그는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온 백성의 탄원의 대상이었고, 전체 역사를 통해서 이미 약속되어 있었던 바로 그 약속된 아기였다! 그는 전인류가 깊이 열망하던 아기였다! 복음사가 마태오와 루가가 예수는 한 남자의 뜻만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이 사실을 표출(表出)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복음사가들은 예수의 탄생을 보통 인간들의 탄생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이들을 훨씬 능가하는 탄생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이 ‘동정녀로부터 탄생하였다’라는 신조(信條)의 깊은 의! 미인 것이다.” 여기서는 마리아의 동정녀 잉채 사실이 명시적으로 진술되? ?있지 않다.
한편에서는 예수의 천주성자성(天主聖子性)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고, 존재론적 사실(kein biologisches, sondern ontologisches Faktum)이라고 규정하면서, 예수가 정상적인 인간의 결혼생활로부터 출생했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신성(神性)에 관한 교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신학자들도 있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예수의 인간적 부친의 존재여부는 예수가 하느님의 독생자(獨生子)라는 사실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마리아의 동정녀 출산과 평생 동정성에 대한 교리의 의미도 애매모호하게 된다. 공관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형제자매들이(마르 3, 31-35 ; 6, 1-6 ; 마태 12, 46-50 ; 루가 8, 16-21) 지금껏 교회가 가르쳐 온 대로 예수의 사촌들이 아니라, 예수의 친형제자매일 수 있다는 가톨릭 신학자인 페쉬(R. Pesch)의 최근 주장은 이와 같은 논리의 맥락 안에서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3. 반론에 대한 해명 시도
마리아의 동정녀 출산 교리를 둘러싼 반론들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이러한 가운데 이 교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기로 한다.
자? О墟隙?반론들이 정확한 과학의 지반 위에서 제기된다면 우선 교회는 이 반론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자연법칙성의 한계내에서 단성생식, 즉 동정녀 잉태란 고등생물체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과학의 통념이다. 그런데 동정녀 출산을 주장하는 신앙조문은 자연과학의 지반 위에서 성립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신조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이나 화학, 또는 물리학의 영역에 적용되는 수단과는 다른 수단이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신조는 세계가 ‘인격적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전제하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 신조의 경우는, 하느님이 세계를 능가하는 절대주로서 이 세계에 내재하는 질서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이 안에서 항상 역사하는 분이시다. 그래서 자연 자체는 개방된 체계이며, 하느님은 어느 때라도 새로운 상황을 조성할 수 있으며 이 상황을 기존하는 자연발생 사건들에 삽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느님이 당신에 의해 정돈된 자연법칙성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수용되고 동화되는 새로운 원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원하기만 한다면 인간의 ? 素Η敾㎏?거치지 않고도 한 처녀의 태내를 열어 아기를 잉태케 할 수 있다 고 우리는 믿는 것이다.
다음은 종교학적 반론에 대해 답해 보기로 하자.
이교(異敎)세계나 유다세계에서는 정치 및 종교의 영웅적인 지도자의 탄생시에 신이 특별히 개입한다는 내용의 설화들이 사실상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설화들에서는 한 인간인 여성과 신과의 성적 교합이 이루어졌다거나, 아니면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자연적 전제들을 거슬러 하느님이 한 쌍의 남녀의 성적 결합을 축복하여 결실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설화가 말해주는 것은 ‘기적출산’이지 ‘동정녀 출산’이 아니다. 그런데 마태오와 루가 복음의 보도는 성적으로 성취된 결합에서의 하느님의 개입에 대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적 결합을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역사에 대한 우리의 불완전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당시 주위 세계의 기적설화들이 마태오와 루가의 예수의 탄생설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해 절대적이며 확실한 해답을 알지 못함을 아울러 시인해야 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종교학의 입장에서는 동정녀 출산을 반대하거나 지지하는 어떤 결과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성서? 玲학적 반론에 대한 해답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동정녀 출산을 둘러싸고 제기된 반론 중에서도 성서주석학적 반론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듯하다. 우리는 마리아에 관한 성서증언을 대할 때에도, 성서기자들의 일차적 관심사는 사실(史實, historia))과 사실(事實, factum)의 보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었음에 유념해야 한다.
마태 1, 1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사실(事實)에 대한 보도라는 의미로 파악된다. 설화 자체는 구약성서의 영보(領報) 도식과 긴밀히 연계(連係)되어 있고, 하느님의 꿈속에서 인간에게 계시를 내린다는 민속적인 견해를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마태오 자신은 그가 보도하는 내용의 사실성을 확신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의 확신들이 사실들과 확실히 부합하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복음 자체에서부터 명료한 판정이 내려지지 않는다. 루가복음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는 그리스도 교리의 신빙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둔 바 있다”(1, 3)고 머리말에서 증언하고 있는데 그 결의 ! 안에 그의 보도의 사실성이 웅변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장 을 지나치게 믿을 것은 아니다. 이러한 표현수법은 고대의 많은 저술가들한테서도 틀에 박힌 듯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비판적 주석만으로는 동정녀 출산을 반대하거나 지지하는 명백한 결단을 내릴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껏 논의된 자연과학, 종교학, 그리고 성서주석학 등이 동정녀 출산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확신을 주는 해답을 주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전적으로 이러한 학문에 의지하여 신앙진리의 진실성 여부를 판정하려 하지 않는다.

2세기 이래, 하느님의 아들이 한 동정녀로부터 육신을 취하셨다는 사실은 비록 충분하게 사유되지는 않았을망정 가장 자명한 신앙자산(信仰資産)에 속한다. 물론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교리가 공의회나 이와 비슷한 회의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장엄하게 교의로 선포된 적이 아직 없기는 하다. 하지만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매우 자명하게 가르치기 때문에 신앙으로써 해답되어야 하는 계시조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사실(事實)을 단정하는 것만으로 동정녀 출산을 둘러싼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 ! 신조의 내용을 순전히 상징적으로나 또는 생물학적 차원을 무시한 존재론적 사실로 해석한다 해도 이 교리를 믿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 신조(信條)에는 확실히 자의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될 조문들이 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의 고성소 행(行)과 승천에 관한 조문이 그러하다. 요컨대 동정녀 출산에 관한 문제는 보다 깊은 신학적 사유를 필요로 한다.

동정녀 출산을 위한 절대적이고도 사실 논리적인 근거는 없다. 하지만 이 사실이 하느님의 지극히 높은 예지와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게 하는 동기들은 발견된다.
하느님의 아들은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육화(肉化)되셨다. 이 육화사건은 다른 많은 사건처럼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라,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으로서 역사를 종말론적 완성에로 이끌어 간다. 그리고 육화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이 역사 안에서 단정해낼 수 있는 여러 사실들을 동반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사실에서 그 사실성(史實性)이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십자가 처형 사실은 공문서상(公文書上)으로 기록, 확인? ?수 있는 사실이다. 십자가 처형사실은 역사 안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임 이 고수되어야 한다. 만일 나자렛 예수가 골고타 언덕에서 참으로 처형되지 않았더라면 십자가에서의 인류구속이나 부활은 가능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처형 사실 그 자체만으로는 신앙에 있어서 그리 큰 의미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십자가 처형이란 그 당시 흔히 볼 수 있었던 처벌 사건 중의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한 증인들은 아마 대다수가 다른 죄수들이 받은 그와 같은 잔인한 십자가 처형을 이미 여러 번 목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자렛의 예수라는 한 청년이 십자가 형틀에 못박혔다고 해서 새삼스레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따라서 범죄자로서의 처형을 당한 이 사람이 하느님의 참된 아들이며, 세계와 인간의 구원자임을 역사적 사건 자체 안에선 알아낼 도리가 없다. 오직 신앙의 눈[眼目]으로써만 이러한 죽음을 통한 구원의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 처형의 의미는 사적(史的)인 것(das Historische)을 무한히 초월한다.
이러한 구세사적 사실들은 역사내 차원에서 검증,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역사의 지평에서 발생한다. 이들은 이를테면 역사! 적 차원과 영원의 차원 사이에서 생겨나는 한계(限界)사건들이어서 역사 안에서 발생하면서도 역사를 초월한다. 구세사적 사실들은 역사 안에서 작용하나, 그 안에서 소멸하지 않는 무한한 하느님에 의해 성취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가(史家)의 연구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구세사적 사실은 사학(史學)에 의해 결코 확인될 수 없으면서도 원칙적으로는 부인되지도 않는다.
동정녀 출산은 의심할 나위없이 구세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사적(史的)으로 명료하게 검증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인 그리스도가 육화함으로써 역사 안에로 들어서기는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역사 바깥으로부터 오는 존재로서 역사의 지평에 등장한다. 물론 이 역사 안에로의 ‘입장’의 행위 역사 이미 역사 안에 ‘입장해 있는 것’과 같이 역사에 속하기는 한다. 그러나 ‘입장해 있는 것’은 오직 역사 안에서만 발생하고 역사를 내부에서부터 초극하는데 비해서 ‘입장’행위 자체는 시간과 영원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다. ‘입장’행위는 시간과 영원에 함께 속한다. 그런데 ‘나자렛 예수라고 이름하던 사람이 살았었다. 그는 본티오 빌라도(Ponti! us Pilatus) 치하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와 같이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역사의 구성요소로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역사적 탄생과 같은 역사 안에로의 ‘입장’행위는 이와는 달리 역사의 범주로부터 벗어난다. 역사의 범주들이 역사의 한계영역에 도달하기는 하지만 한계 자체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잉태는 부활절 아침날의 부활사건과 한 평면선상에 위치한다.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으로부터의 소생이 아니라, 그의 잉태시에 하느님이 영원으로부터 역사에로 진입했듯이, 이제 역사로부터 영원에로의 초월이 발생함을 의미한다. 부활사건의 사실성 역시 동정녀 탄생의 사실성처럼 사적으로 명백하게 제시되지는 않는다.
이 두 사실들은 오로지 신앙인에게만 파악될 수 있다. 신앙인은 사가(史家)들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을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신앙인에게 그에게 개현(開顯)된 바에 대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그는 사가들처럼 먼저 논증하려 들기 전에 확신을 가지고 증언할 것이며,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공포할 것이다. 복음사가들이 주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잉태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 바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신앙을 공포한 것이며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과학도, 종교학도 그리고 역사비판적 주석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오로지 신학적 명상만이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믿는다.
요컨대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를 출산하였다는 교리의 핵심은 온갖 생명과 존재의 창시자요 원천이신 하느님이 바로 예수의 인간적 실존의 유일무이한 기반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동정녀 출산을 거슬러 반론을 제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는 그의 인간존재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받았다. 충만하신 성부로부터 직접 받았기에 충만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인간이면 누구나 다 그래야 되겠지만, 우리 인간은 범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모상성(貌像性)을 상실함으로써 이 충만한 인간성을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죄인들인 부모와 당시대의 세계 안에 태어났고, 이렇게 태어난 새로운 지구시민은 즉시 기존세계의 악에 물들었다.
그런데 성령으로 말미암은 동정녀 출산이란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개시된다는 표! 징이다. 동정녀 출산은 새로운 창조(nova creatio)이면서, 첫 번째 창조와 유대를 맺고 있다. 새로운 시작이 오로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개시된 것이다. 이와 같이 동정녀 출산 교리는 먼저 마리아 관해서 진술하는 대신 아들에 관해서 진술하고 있다. 이 교리로부터 우리는 구원의 차원을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구원은 순전히 은총으로부터 나오는 하느님의 역사(役事)다. 성부가 성령을 통하여 동정녀의 태내(胎內)를 열어서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구현되도록 역사(役事)한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행업이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의 증거로서 이루어지긴 하나, 인간의 자유를 무시하고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인간의 자유로운 신앙의 결단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고 인간이 하느님의 동반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그분의 선물의 책임있는 수용자(受容者)가 된다는 말이다. 하느님에 대한 이 진정한 인간적 처신을 구세주의 모친이 된 한 여인이 완성된 상태로 보여준다. 이 여인은 순수하게 신앙하고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내적 처신의 표징적 표현을 곧 동정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마리아가 예수를 출산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과 함께라는 공동 ? 脩?원리를 적용해선 안된다. 만일 마리아가 하느님과의 공동의 출산 원리였다면 신화와 같은 신출산(神出産, Götterzeugung)이 발생하였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마리아는 더 이상 동정녀라고 불릴 수 없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마리아는 자유로써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수용한 분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어머니이면서 동정녀로 머물고, 동정녀이면서도 어머니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 일은 성령의 힘으로 성취되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이루어지소서’(fiat)를 말함으로써 이를테면 이 구원계획을 위하여 축성된 것이다. 이것이 신앙교리가 말하는 마리아 동정성의 핵심사상이다. 관건이 되는 것은 성(性)이 아니라, 마리아의 신앙이다. 마리아의 신앙은 존재의 최후 심층부에까지 도달한다. 마리아는 자신의 전존재를 하느님께 선사한다. 이러한 가운데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고 하느님이 그녀의 아들이 된 것이다.

우리는 마리아의 동정녀 출산에서 관건이 되는 문제는 바로 신(神)문제, 하느님에 대한 문제라고 본다. 하느님은 세계로부터 요원하게 떨어져 있는, 즉 세계와는 무관한 절대자인가, 아니면 그? ?창조세계를 알며, 사랑하며, 여기서 현존하며, 오늘도 여전히 역사하는 ? 苡팀獵?분인가? 하느님은 역사(役事)하는가? 아니면 역사하지 않는가? 역사하지 않는다면 그가 도대체 하느님일 수 있는가? 그런데 예수의 동정녀로부터의 탄생 신앙은 하느님이 참으로 역사한다는 신앙이다. 그리고 그가 역사하기 때문에 땅이 결실을 맺는다는 신앙이다. 이 신앙은 하느님이 당신의 창조세계를 포기하지 않고 구원에로 이끈다는 신앙이다. 그리스도인의 희망과 자유, 여유와 책임이 바로 이 신앙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

4. 맺는 말
우리는 마리아의 동정녀 출산에 대한 교리를 논하면서 마리아한테서 행한 하느님의 위업에 관해 주로 언급하였다. 마리아를 논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마리아를 뒷전에 두고 하느님을 전면에 세운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방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마리아에 대한 진술이나 공경은 마리아에 머물지 않고, 그녀를 넘어서 하느님을 지시하고 찬미하는 데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온갖 찬미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목표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의 충실한 경청자로서, 하느님의 뜻에 ‘이루어지소서’를 말하는 주의 시녀(侍女, ! ancilla Domini)로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려고 자신을 낮추는 가운데 은총으로 충만하게 되고 하느님의 모친이 된 것이다. 마리아는 하느님에 의해 전적으로 성화되고 탁월한 위치로 현양되어, 당신에게 행한 하느님의 위업에 대해 찬미하기만을 원하는 분이다.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우리들 동경의 대상인 구원에 이른 새로운 인간의 원형을 본다.
모든 그리스도 신앙의 복음선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들을 하느님 성부께 인도하려는 목표를 지닌다. 바로 삼위일체적 하느님 안에서 인간이 구원되어 목표에 이르기 때문이다. 인간구원은 이러한 점에서 항상 그리스도의 구원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은 인류사에 획기적인 의미를 가져다준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의 신앙을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마리아 신심 내지 공경이 과장된 형태를 띠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마리아 신심 내지 공경이 이처럼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이루어질 때, 소외된 현실 세계 속에서 구원을 갈구하는 뭇 구도자들에게서 생겨나기 쉬운 망설임과 회의감을 지양시키고, 이들을 구원의 ! 핵심진리에로 쉽게 인도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또한 과도한 마리아 공경에 반발하는 비가톨릭 그리스도인과의 일치운동도 건전한 방향에서 모색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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