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한인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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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계절이면 어김없이 우리들 고향마을 밭귀퉁이나 가시울타리에 누런 호박이 가슴살을 맘껏 내밀고 가을 햇살을 쬐는 풍경들이, 한가위 보름달에 비추인 토담지붕위 박덩이와 함께 우리들을 고향땅으로  고향땅으로 자꾸만 끌어 당기고 있다.
옛날 진(晋)나라시대 시인 도연명이 그랬던 것 처럼 모든것 다 놓아버리고 귀거래사(歸去來辭)라도 읊으며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계절이다. 그러나 도연명은 혼탁한 세상에 염증을 느꼈을때  돌아갈 고향마을과 고향집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에겐 이제 그런 고향 마을도 집도 흔적도없이 사라지고 없으니 보따리를 꾸려봤자 딱히 길잡을 방향이 있지도 않다.

이계절, 나를 이토록 고향 그리움으로 몸살 앓게하는 이 호박을 사실 당시는 그리 귀하게 대접해 주지도 않았거니와 너무 흔해 빠진것이라 고마운줄도 모르고 천덕꾸러기 취급하기 일쑤였다. “호박꽃도 꽃이냐 ?“ 또는 „호박같은여자“하면 그시절 살집이 좀 풍부하다 싶은 여인들을 보고 하는 말이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나는 또 어린시절 호박범벅, 호박밥에 질린터라 호박을 넣은것이라면 울능도 호박엿 마저도 싫어할 정도였다. 애호박 썰어넣은 칼국수는 그런대로 좋아 하였지만,  식량이 충분치 않던 시절이라 호박을 섞어 질척하게 지은 밥과 밀가루를 풀어 멀겋게 쑨 호박범벅을 여름철 내내 저녘끼니로 때워야 했으니, 나에게 호박은 그야말로 „호박“일 뿐이였다 . 또 호박은 밭 귀퉁이나 논두렁같은 쓸모없는 구석땅에 심을 뿐 호박을 위해 넓다란 터를 내 주지도 않는다. 그러니 호박은 다른 고급 농작물로부터 텃세받으며 구석으로 밀려나서 밭가는 농부의 발끝에 채이기도 하고 때로는 쟁기끄는 소 뒷발에 밟혀서 깨어지기도한다. 그래도 호박은 쉬임없이 꽃을피우고 열매를 맺어 크게 크게 키워나간다.

작년가을 한국여행때 가을햇볕이 아직도 따갑던 10월중순쯤 어느날 경북 구미시의 어느 산길을 아내와 산책하던중 밭둑 가시덤불에 배배말라 비틀어진 호박덩굴이 엉켜있었고 거기 노란꽃과 호박 하나가 축 늘어져 매달려 있는것을 보는순간 가슴에 알수없는 목메임의 감정이 밀려와서 털석주져앉아 엉엉울고싶은 강한 충동을 간신히 억제한 일이있었다. 인간의본향(本鄕), 어머니의모태(母胎)에 들어와 앉은 그런 서러움과 희열의 복합된 감정이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없다. 노란 꽃에다 코를 대보니 바로 어린시절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잡고 다닐때의 그 어머니의 치마냄새가 거기있는게 아닌가!

올봄,  해동(解冬)하자마자 나는 정원 잔디를 군데 군데 걷어내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여섯구덩이나....  기화요초(琪花瑤草) 를 심어 정원을 예쁘게 가꾸어온 아내에게  호박을 설득하기엔 상당한 무리(?) 가 따랏으나 하여튼 호박을 심었고 , 싹이나서 무럭무럭자라  꽃을피우고 열매를 맺어 올해는 흥부네 사촌집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손바닥만한 정원이 온통 호박 일색이 되어 버렸다. 호박꽃이 필적마다 잔 기우려 축복해 주었고 이름도 지어주었으며 (황진이, 견우,직녀 이런식 으로 ) 아침마다 일어나서 제일 먼저 호박넝쿨 자리잡아주는 기쁨으로 하루 하루를 시작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복된 아침기도가 어디 있을것인가.

젊은시절 장미향에 취하여 이리 저리 방황하기도 하였지만 , 이제 나는 당당히 호박꽃을 사랑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아니 벌써 깊이 깊이 사랑하고 있다 하겠다. 어떤 이웃 아낙은 주렁 주렁 달린 호박덩이를 보고 감탄도 하였고, 또 어떤 여편네들은 저히들끼리 깔깔거리며 웃기도 한다.그러나 어쨋든 올여름 우리 부부에게 호박은 많은 위로가 되었으며 또 많은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있다.
호박을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 “박과의 덩굴진 일년생 풀, 잎은 심장형, 여름에 누른꽃,자웅동주, 과류중 가장 큰 열매가 열림, 열매, 잎, 어린순은 식용“   대충 이렇게 적혀있다. 한마디로 버릴게 하나도 없다는 애기다. 무성하게 뻗어나는 새순을 골라 솎아 밥위에 쩌서 된장에 찍어 먹으면서 ’어린시절의 어머니’를 만나기도한다. 또 그 싫던 호박범벅도 두어번 만들어 먹었다. 씨도 따로 모아 말린다. 이것 또한 늙은이들의 전립선(前立線)  퇴화방지에 약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그 시절 그렇게 천대받던 호박죽은 오늘날 건강식으로 고급 음식점에서 전식으로 나오는것을 보기도 하였다. 호박벌이 넉넉한 꿀을품은 노란 호박꽃속에 머리를 박고 꿀을빠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퉁퉁불은 엄마의 젖을빠는 아기의 모습이다. 풍요와 평화가 거기서 보인다.

이제 가을이다. 나도, 또 대부분 본당, 지방공동체 형제 자매님들도 모두 인생의 가을을 살고 있다고 하겠다. 가을은 짧다. 곧 겨울이 닥친다. 그 삭풍몰아치는 겨울이 닥치기 전에  – 그날과 그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마태 24:36-  나는 내가 쥐고있던 모든 „집착의끈“ 을 놓아야 한다고 하는 나의 내면으로 부터의 소리를 듣고 있다.  이것은 양심의 소리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타이르는 당부일지도 모른다.  추석 한가위 둥근달을 처다 보면서, 또 크고 살찐 둥근 호박앞에서 각(角)을 각(角)으로 응대하며 살아온  ’나’를 성찰한다. 각을 각으로 막으려 했으니 생채기만 날 수 밖에 없었던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많이 늦었다. 그러나 늦었다는것을 안것은  또 ’이름’ 일수 있겠다. 이제 누가 각(角)을 날카롭게 들여 대어도 호박으로 막을 참이다.  세상의 온갖 영화를 다 누리고, 또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왕  솔로몬의 그의 만년의 탄식 섞인 설교 „헛되고 헛되다 세상 만사 헛되다. 전도서 1:2“를 깊이 묵상해야 할 계절 가을이다.

우리들도 이제 밭 귀퉁이 가시울타리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호박처럼 그렇게 발로차면 딩굴고, 밟으면 깨어지기도 하면서, 또 뜯어먹겠다고 덤비는이 있으면 어깨살점 한점쯤 내어 주면서 그렇게 살아가자고 외치고 싶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시어 거룩한 „성체성사“를 세우시지 않으셨는가 !    
  • ?
    남궁춘배 2007.09.20 16:07
    최바오로 형제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늦가을 아니면 초겨울의 인생을 살면서 차면 딩굴고 밣으면 깨어지기 보다는 남이 채일까, 아니면 밟일까, 남이 상처입을까를 생각하며 배려하는 삶이 어떠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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