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한인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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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오로사도의 발자취를 찾아서“ 순례를 다녀와서 -

여행의 마지막은 늘 그렇듯이 옷차림도 마음도 다 후줄그레하다. 여행 중의 즐겁고 들뜬 기분이 아래로 푹 쳐지는 날이기도 하며, 내일부터 다시 시작될 따분한 일상을 생각하노라면 비행기 창 밖에 흘러가는 구름조각을 보고 느끼는 감흥 하나도 가는 날과 오는 날이 같을 수가 없다. 여행 내내 단벌로 비벼댄 옷차림 또한 땀에 절어 더욱 그러하다. 여행에서 돌아와 이 후줄근한 모습을 털고 출근, 퇴근, 밥 짓고, 설거지, 빨래, 등등 일상의 쳇바퀴가 열흘 쯤 돌고난 어느 날 저녁 아내 아네스가 불쑥 내뱉는다. “아! 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 순례여행이 벌써 그립네. 당신은?” “난 아직, 그냥, 뭐...” 떠듬거리며 얼버무리긴 했지만 내 속에서도 이미 다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다음 순례에 대한 막연한 설렘이 싹트고 있음을 알았다.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계절이 가을이고 또 신부님과 교우들과 함께하는 성지순례임에랴! 몇 달 전부터 성서를 뒤적인다, 여권을 찾아 유효기간을 확인한다, 지도를 찾아본다, 부산을 떨다 드디어 떠나는 날 아침, 옆집에 열쇠를 맡기고 역으로 나와 아내와 함께 함부르크 행 IEC에 올랐을 땐 한해를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만 같았다. 설렘이었다.
함부르크 공항에서 신부님과 교우님들, 작년 파티마 순례를 함께 했던 공지영 마리아님, 라스팔마스 요셉 형제님 부부, 우리 공동체 프란체스카 자매님의 학창시절 은사, 이숙자 수녀님과 합류, 반가움에 넘친 포옹을 풀 사이도 없이 비행기는 오후 늦게 일년 동안 나에게 설렘으로 자리했던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한다. 프랑크푸르트와 오슬로에서 직접 이스탄불로 오신 분들과 만나 -작년에 함께 했던 오슬로 공동체 김상숙 회장님도 이번에 또 함께 하게 된다 - 호텔에 여장을 풀고 일박 하고 나니 작은 소동이 밤사이 있었다. 본당의 한 형제님이 갑자기 아파서 신부님과 가이드 김이보씨가 병원엘 다녀왔고, 어제 여권 유효기간 만료로 입국이 문제된 부부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채 공항에 억류중인 상태다
8시 20분, 아다나행 비행기 탑승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조반을 마친 후 비를 주룩주룩 맞으며 버스에 올라 공항으로 이동. 터키 국내선 비행기로 지중해 남쪽 도시 아다나 공항에 내리니 날씨는 남국의 더위였다. 섭씨 30도를 넘을 듯싶다. 독일의 한여름 날씨만큼 덥다.

그리스 신화, 로마사, 또 성서에 해박한 건축학도인 가이드 김이보씨의 설명을 들으며 - 그는 이제민 신부님의 진해고교 까마득한 후배다. 인연이다. - 안티오키아로 향한다. 버스는 한 좌석의 여유도 없이 45명 45석이 빼곡 찼다. 버스가 몇 시간을 달려 iskenderun만 아래쪽에 위치한 안티오키아에 도착. 베드로와 바오로 시대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숨어서 미사를 드렸다는 전설이 있는 베드로 동굴성당을 방문한다. 여기서부터 우리들은 바오로 사도, 그분의 발자취를 밟기 시작한다. 이 도시 안티오키아가 그 당시 교통의 요충지여서 바오로사도께서는 이 도시를 거점으로 전도여행을 다니셨다 한다. 이번 순례를 떠나면서 “그분을 만나보자, 그분의 숨결을 느껴보자, 그분의 발자국을 밟아보자, 그리하여 그분의 믿음에 한 발 가까이 다가 가보자” 다짐했던 나의 의식은 시간의 여행을 하기 시작한다. 2천년 전에 그분이 이 석굴성당에서 미사 드리는 모습을 그려본다. 미사에 함께한 그리스도교인들은 어떤 복장을 하고 있었을까? 베드로 바오로 두 사도가 여기서 함께 미사 집전한 일도 있었을까? 석굴 뒤에는 로마군의 기습에 대비한 대피석굴이 뒷산으로 길게 뚫려 있다. 좋은 성당 건물, 잘 다듬어진 장궤틀에서 무릎을 비틀고 있는 내 모습을 반성한다.

우리들은 달리고 또 달린다. 지금 우리들이 버스로 달리는 이 길이 그때 사도일행이 가죽신을 신고 걸어가신 그 길일 것이다. 순례 3일째(10월 13일) 우리들은 해안도시 메르신에서 숙박 후 아침 7시 30분, 지중해 아침바다가 붉게 물드는 창 밖을 내다보며 미사를 드린다. 이제민 에드워드 본당신부님의 영명축일이다. 영명축일을 맞으시는 신부님과 또 다른 모든 사제 수도자들이 세상의 악의 유혹을 이기고 완덕에 이르옵소사 기도드린다. 이 시대의 사제 수도자들이 한 길을 가기에 얼마나 힘들 것인가! 그분들에게 바오로사도의 통공이 있기를 기도드린다.
길을 서둘러 바오로사도의 고향도시 다르소에 들러 사도의 생가터라고 전해오는 폐허 집터에서 우물을 길러 물세례를 - 도르레를 너무 세게 돌려서 - 받고, 모두들 손을 씻는다.
다음날 아침 미사강론에서 신부님은 “고향” “나의 고향은” 이라는 묵상 화두를 주신다. 다음 날은 또 “길”을 묵상해 보자 하셨다.
달리는 창 밖 목화송이 따는 여인들이 모습이 어린시절 고향마을의 산허리 밍밭 - 고향 사투리, 무명밭을 밍밭이라 했다 - 의 할머니, 어머니, 누이의 모습으로 겹쳐온다. 그 시절 산허리 밍밭에서 어머니 눈 피해 다래 따먹던 소년이 60을 바라보는 나이 되어 아시아의 서쪽 땅끝을 순례하면서 그 “밍밭의 할머니, 어머니”를 만난다.
미사에서 나는 또 기도드린다. “하느님, 제가 떠나온 고향마을, 제가 지나온 길을 축복하여 주십시오. 또 앞으로 제가 가야할 길, 돌아갈 영원한 고향길도 축복하여 주십시오.”

길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가빠도기아 지방을 우리들은 계속 순례하고 있다. 거기서 나는 “百聞이 不如一見”이라는 옛말을 실감한다. 보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자연의 신비, 오랜 세월 풍화작용에 의해 생긴 현상이라 한다. 그러나 그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들은 모두 내 눈에는 인위적으로 빚은 거대한 조각 계곡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냥 볼거리일 뿐이었다. 데린쿠유 지하동굴도시 안을 들어가서는 나는 상상의 한계를 느껴야만 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많을 때는 3만 명이 300년 동안이나  대를 이어 오면서 바깥 동네(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적(관군)을 방어해 가면서 이 좁은 미로 같은 동굴 속에서 공동체 사회를 이루어 살아왔다니!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며 그 안에는 교리학교도 있었으며, 여러 개의 지하 동굴 도시가 수 킬로미터의 지하동굴로 서로 연결되었다 한다.
우리들이 들어갔다 나온 곳은 전깃불도 밝혀놓고, 계단도 만들어 놓은 현대 관광객을 위한 짧은 코스였는데도 독일 광산생활을 3년 한 나도 그 날 이후 며칠을 허리앓이를 했어야 할 만큼 힘들었다.
박해시대의 순교자 기록이나 그분들의 이름 앞에 설 때면 꼭 내가 자문해 보는 게 있다. “내가 신앙과 생명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늘 나는 고개를 떨구곤 했었다. 만약 내가 그 시대 그 마을에 살았다면 나는 밖에 살았을까, 동굴 안에 살았을까? 그 시대 그분들의 생활을 아픔으로 느껴보려 했지만 결국 나는 가볍게 지나가는 순례객에 불과할 뿐이었다. 등에 배낭을 짊어진.

가빠도기아 순례 중 콘야(이고니온)에서 묵는 날 밤에 여권문제로 입국이 거부되었던 마리아 요셉님 부부가 007을 방불케 하는 작전(?)으로 아테네까지 날아가서 아내 마리아님의 여권 연장을 받아 기어코(드디어) 우리 순례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작년 피티마 순례 때도 함께 했던 분들이고 의형제 사이인지라 나로서는 더욱 기쁜 일이었다.
여행 며칠 째이던가. 신부님께서 지금까지 어디어디를 다니고, 무엇을 보았으며, 어디어디서 묵었는지 차례대로 기억하겠냐고 물으신다. 매일 다른 호텔에서 묵고 또 매일 이동하는 여행이라 여러 날 겹치니 가물가물한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들은 계속 길을 간다. 그분이 걸었던 길을 뒤밟아 찾아가는 것이다.
안탈리아에서 묵을 때는 처음으로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여유도 있었고, 또 바오로사도의 1차 전도여행 때 배로 도착했던 베르게의 폐허를 답사한 후 배 한 척을 전세 내어 당시사도 일행의 항해를 두 시간쯤 체험하기도 했다.
매일 아침 기상 후 7시 30분에 호텔에서 미사를 드린다. - 두 번을 제외하고 - 독서에서 바오로사도의 서간문이 봉독된다. 오늘 또 새로이 만날 그분의 발자취를 그려본다. 복된 시간이다. 신부님의 강론은 지극히 절제된 말씀으로 맺으신다. 나의 신앙생활 태도의 군더더기를 빼야 되겠다고 다짐한다.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신부님은 또 새로운 묵상화두를 던지신다. 바오로 서간문 전편에 흐르는 사랑의 실천 권고를 나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당장 오늘 함께 순례 여행하는 형제자매님들에게 고루고루 실행하고 있는가, 성찰해 본다. 그러나 부끄럽다.

성모님의 집에서 미사를 드릴 때는 많은 자매님들이 우신 것 같다. 아내 아네스도 눈자위가 젖어 있었다. 아드님을 십자가에서 잃고 여생을 먼 이곳 산꼭대기에서 사시다가 승천하신 성모님의 모성을 자매님들은 공감하셨음일 것이다.
천주교 신자가 되어 이곳 성모님의 집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음은 나에겐 참으로 복된 은총의 순간이었다. 나의 지난 생의 굽이굽이를 되돌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작년 순례때 신부님께서는 순례의 원본을 성모님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라 하셨다. 성모님의 생의 처음에서 마지막까지의 전부에서 나의 인생순례의 나머지 부분을 메꾸어 나갈 가르침을 찾아야겠다, 생각해 본다.
에페소 유적지를, 그 폐허로 남아 있는 도시를 뙤약볕 아래 걸으면서 귀로는 가이드의 해박한 그리스 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발로는 많은 서간문을 이곳에서 쓰신 사도의 발자국을 찾아보려고 더듬거린다. 이곳이 로마시대 도시형태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 한다. 중앙에 마차가 다니는 차도, 그 옆에 사람이 다니는 인도, 가게, 주택 순으로 부서진 채 남아 있다. 특히 가게 자리는 지금도 점방을 차릴 수 있을 만큼 칸막이벽이 그대로 서 있다. 그 가게 터 어딘가에는 당시의 문방구점도 있었을 것이고, 사도께서 저녁나절 종이와 잉크를 사 가시지 않았을까? 이 폐허 앞에서 시간의 무상함, 무상한 시간의 흐름을 읊고 또 읊는다.

이즈미르에서 하루를 묵은 후 우리들은 계속 요한 묵시록의 7교회 중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티아디르, 베르가모 교회를 차례로 순례한다.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사르디스 유적지에 갈 때, 그때가 오전 중이어서 서늘한 산공기가 골짜기를 내리덮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석조 건축물 아르테미스 신전의 폐허가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산중턱 중앙에 있고 주위에는 인가도 없어 거기 들어서는 순간 나는 이상한 괴기감을 잠시 느꼈다. 내가 꼭 3천 년 전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잠깐 느낀 것이다. 왠지 모르겠다. 기원전 1200년의 도시라고 하니 우리나라로 치면 신라시대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오는 사건으로부터도 천 년 전의 일일 텐데 저 거대한 석조 건물을 무슨 기술로 지었단 말인가! 스스로 건축학도인 가이드 김이보 형제도 불가사의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폐허 초입에 돌덩이 하나를 들다가 부러져 처박혀 있는 기중기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 신전 기둥 옆에 초라한 붉은 벽돌의 경당이 붙어 있다. 사도께서 그곳에서 기도한 곳이라 한다. 벽에 손을 대고 묵상기도를 바친다. “바오로사도님, 당신께서 전파한 복음이 한 세월 후 다시 이곳에서 꽃 피어지이다.”
오늘 날 세상 사람들 중 한 사람도 믿지 않는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의 허구(fiction)를, 이 시대 겨우 문학의 시녀로만 존재하는 그 허구의 인물들을 숭배하기 위해 축조한 수많은 신전들이 오늘날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다 부셔져 폐허로만 남아 있다. 허구의 신들을 숭배하기 위해 만든 신전, 거기에 동원된 인간의 강제 노역에 하느님의 노여움은 없었겠는가, 생각해 본다.

호머의 대서사시 중 트로이 전쟁의 현장 유적지 트로야를 둘러본 후 우리들은 차냑칼레에서 다르다넬렌 해협을 건너 유럽쪽 터키 땅인 마르마라해 서안을 따라 이스탄불로 돌아온 것이 10월 20일 저녁 무렵이었다. 이스탄불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순례 중 얘기들을 나누었다. 스위스 공동체 마리안느 자매님의 이야기가 충격으로 남아 있다. 오랜만에 한국식당에서 한식으로 배불리 먹는다. 이튿날, 이스탄불 그 역사의 도시를 둘러본다.
성 소피아 성당 안에서는 천년의 그리스 문명에 회칠한 이슬람을 본다. 그 이슬람이 500년 후 그리스도 문명의 본당인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힘의 문제인가. 역사의 문제인가? 긴 하느님의 눈으로 볼 때는 이 모든 것이 다 의미있는 일일까?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상에서 성쇠 영욕(盛衰 榮辱)의 2천년 세월을 묵묵히 참아온 이스탄불에게 그러나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스탄불에서 마지막 밤을 보냄으로써 설렘으로 시작한 바오로사도 발자취 순례를 무사히 마쳤다. 모두들 자기 고장으로 돌아가는 채비에 분주하다. 그러나 나의 순례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 다음 순례, 또 나의 남은 인생순례가 설렘으로 남아 있다. 이 세상 이후의 순례 역시 설렘으로 다가올 때 진정 나의 방황도 끝나고 내 믿음도 완성에 이른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약한 미풍에도 흔들리는 초겨울 갈대와 같은 나에게도 그런 굳은 믿음의 은총이 임할지 모르겠다. 기도할 뿐이다.

첨:
- 이번 순례여행 중 아침마다 미사준비 하시고, 순례 전 기간동안 무거운 미사가방 챙겨주신 손대조 요셉 형제님께 고개숙여 감사드린다.
- 순례 중 매일 아침미사 때마다 우리 부부, 신연주 마리아, 김명자 데레사 오스나부뤽공동체 넷은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두 형제님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드렸다. 하루 빨리 건강한 모습으로 뵙기를 빌고 또 빈다.
- 여행 내내 신부님께서는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특히 자매님들께 당부하셨다. 터키에서 복잡한 곳을 관광할 때는 배낭을 앞가슴에 메고 다니면서 조심을 하였는데 막상 독일에 돌아와서 일이 벌어졌다. 함부르크 역에서 기차에 오를 때 좀 복잡하다 생각되었는데 자리에 앉아보니 마리아 자매님, 또 나의 배낭이 열려 있었고 다행히 중요한 것은 뒷가방에 넣어두지 않았기에 잃어버린 것은 없었다.
- 성지순례에서 무엇을 남기고 싶어 하느냐! 하는 속됨에 대한 경계인가. 이번 여행에서 찍은 필름2통(36*2)이 사진관에 맡긴 게 증발해 버렸다.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우리 부부의 모습이 담긴 필름이 있으면 보내 주십사 이 지면을 빌어 부탁드린다. 그분들께는 다른 순례 때 사진 봉사 해드리리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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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브리엘 2004.11.18 00:05
    회장님의 기행문 잘 읽었습니다.
    (신부님 글 보다 더 잼~ ^^; 있어요.)

    글을 읽으니 같이 성지 순례를 하는 느낌 입니다.
    언제 저희 가족도 꼭 함께하고 싶은데...
    언제고 그런 행운의 기회가 있겠지요~

    그럼 건강 주의 하시고 사모님께도 안부 부탁 드립니다.


    -브레멘에서 가브리엘-

    p.s 12월 오스나부뤽 겨울날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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