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 두셨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등등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됩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양이냐 염소냐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러나 막상 실천의 기회가 오면 머리로 계산하고 따집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반대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새롭게 출발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풀면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보나벤투라 성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이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되길 희망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나그네가 되신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습니다.
“신앙인은 믿음과 사랑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베풀어야 할 사람이기보다는
베풂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사랑 실천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많아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내어줄 수도 있고, 단순히 배려의 마음을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내어줄 무언가는 항상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천의 의지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가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