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성주간을 보내고 있는 이 주간은
특별히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르는 것 같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 주일미사를 봉헌한 지 얼마 지나지 않다고 느껴지는데
벌써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 지나 버렸습니다.
사실 올해는 성삼일의 전례를 혼자서 봉헌하기 때문에
전례에 대한 부담감도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 현양 때 부르는 노래, 부활 찬송을 연습하느라
꽤나 오랜 시간을 잡아먹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그런 부담감이 없으니
느긋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은 거기에 역행하듯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혼자서 주님 수난 성금요일 전례를 거행하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십자가 현양이 얼마만큼 소중하고 고귀한 시간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십자가이지만 조금씩 벗겨지며
온전히 드러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거기에 매달리지 않으셨다면 끊어진 모든 것을
이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는 가로와 세로가 만납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맞닿아 있는
바로 그곳에 우리 주님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보통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깊은 흠숭의 표시로 고개를 깊게 숙입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서는 십자가에 도달하기까지
세 번의 무릎을 꿇고 십자가에 입을 맞추는 방식으로 현양을 하더군요.
물론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그런 식의 현양은
전혀 가능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십자가를 향한 나름대로 최대한의 흠숭은
십자가의 그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한 수난기 역시 긴 텍스트이긴 하지만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예수님의 삶을 묵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아시다시피 요한복음은 빌라도를 향해 약간은 호의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물론 결국에는 사형을 언도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던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빌라도 역시 예수님의 죽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지시한 건 바로 그 사람이니까요.
아무튼 요한복음의 수난기에서 특히 의미가 있는 건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들의 이야기와
성모님께 요한을 아들로, 요한에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소개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수난기 역시 해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보편지향기도입니다.
평소와는 달리 신자분이 아닌 사제가 기도하는 보편지향기도는
모든 지향을 담아 하느님께 청하는 기원입니다.
올해는 좀 더 의미가 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 빨리 코로나 바이러스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시간이 금세 지나갑니다.
내일만 지나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겠지요.
모두에게 의미 깊은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