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형제자매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리고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5-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구체적인 이웃사랑의 실천에 두셨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등등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양이냐 염소냐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러나 막상 실천의 기회가 오면 머리로 계산하고 따집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반대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성 그레고리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가 새 출발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풀면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성 보나벤뚜라)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행동으로
사랑하는 날 되길 희망합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장영희 교수님의 ‘좋은 사람’이라는 글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 은 특징 없고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나는 새삼 ‘좋은 사람’ 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 누구의 마음에 ‘좋은 사람’ 으로 남는 게 얼마나 힘들고,
소중한지 깨닫기 시작한다.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따뜻한 마음, 아끼는 마음으로
날 ‘좋은 사람’ 으로 기억해 준다면,
수천수만 명 사람들이 다 아는 ‘유명한 사람’이 되는 일보다
훨씬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삶을 다하고 죽었을 때 신문에 기사가 나고
모든 사람이 단지 하나의 뉴스로 알게 되는 ‘유명한 사람’보다
누군가 그 죽음을 진정 슬퍼해 주는 ‘좋은 사람’이 된다면,
지상에서의 삶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