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공동체와 바리사이들의 공동체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두 공동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자유’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공동체에서는 율법을 어기면 바로 퇴출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공동체에서는
유다가 끝까지 거부하지 않는 한 그를 품어줍니다.
이 두 공동체를 비교할 때, 군대와 수도회를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군대는 규율에 따라 통제되고 그 규율만 잘 지키면 칭찬을 받습니다.
히틀러가 처음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은 곳이 군대입니다.
반면 수도회는 군대와 다릅니다.
분명 규율이 있지만, 그 사람이 평가받을 때는
성령으로 충만한 가가 그 평가 기준이 됩니다.
또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 수도회를 나갈 수 있고
다른 영성이 있는 수도회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수도회들은 지나치게 규율을 강조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보다
조금은 바리사이 공동체에 가까운 모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규율이 강한 공동체에서는
그 규율 때문에 성령을 받는 일에 소홀해질 수 있습니다.
규율을 잘 지키는 것으로
성령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유방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라 한다면 딸이 딱 몇 시까지 안 들어온다면 호통을 치는
그런 가정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지켜줘야 할 마땅한 것을
지키든지 말든지 할 자유를 주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언제까지 자녀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가 보장되었을 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시키지 않아도 모든 규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공동체에서는
자신이 죄인인 줄도 모르고 자신을 단련할 기회도 잃을 수 있습니다.
어떤 죄의 경우에는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라면 어느 정도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성장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지,
아예 그런 것을 차단해버리면 자신이 의인인 줄 알고 성장도 멈춰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규칙으로 통제된 공동체가 아닌
자율적인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꼭 필요한 신의와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자유를 줄 수밖에 없는
성령으로 맺어진 그러한 공동체를 원하셨습니다.
물론 살다 보면 그런 선을 넘는 실수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엮였기에 서로 용서하며 성장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공동체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공동체의 힘은 잘잘못을 따지는 규율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는 성령에 있습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인 성령을 담는 새 가죽 부대의 공동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