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자녀

by 박철현 posted Feb 2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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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본능적으로 내 생존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해가 되는 사람을 멀리 하는 처세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복수하고픈 것은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이들에게 잘해 주며,

자신을 저주하는 이들에게도 축복하고심지어 자신을 학대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가르치신 이유는

그렇게 해야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신 분’(35)이시니,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

가르치십니다.

그 가르침을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도 죽기까지 실천하셨습니다.

반면에 예수님 당시 유다교 지도자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으시는 분이시고,

누군가가 겪는 불행은 하느님께서 주신 벌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직접 복수하게 하지 않고,

국가공권력이 대신하여 벌을 주고 있습니다.

동태복수법의 정신에 익숙한 우리는 가해자에게 그 악행에 비례하여

판결이 내려지고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잘하는 사회를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예수님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안에는 사랑만 있고 그분의 정의는 없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세상 종말과 함께 공정하고 냉정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판단과 심판은 철저히 하느님의 손에 맡겨야겠습니다.

부모님에게서 자녀가 태어나고, 부모님의 호적에 이름이 올랐기에

그분들의 자녀라 불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태어난 생명은 인간으로 사는 법을 부모님으로부터 배우면서

그 부모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어 갑니다.

그렇듯 우리가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로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수 보여주신 하느님을 잘 배워서

하느님의 삶을 살아야 진정으로 그분의 자녀라 불리기에 합당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