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멀쩡한 사람에게 고문을 가한 어떤 사람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러한 일을 했다고 변명한 적이 있고,
탈법적인 방법과 노동임금의 착취를 통해 돈을 번 어떤 기업인이
경제발전의 주역이었다고 주장했던 적이 있으며,
민주화에 가장 역행했던 카멜레온 같은 일부 언론들이
언론의 민주화를 외치며 정의를 부르짖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정의는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는 모든 것을 다 잃고 돌아온
아들을 다시 끌어 안아주기도 하고
당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같은 고상한 인물들보다는
세리나 과부 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정의입니다.
실존주의 철학가 키에르케고르가 한 말 중에는
“신 앞에 선 단독자”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하지
그 성당에 신부가 멋있어서 혹은 수녀가 호감이 가서 아니면 친구 때문에
신앙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가진 신앙이라면
그 인간들이 싫어지면 신앙도 버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도 나와 하느님과의 단독적인 관계이요
심판도 나의 삶에 대한 결과를 그분 앞에서 단독으로 심판받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또 하나 경계할 점은
다른 사람과 비교 판단하는 일입니다.
저 집은 이런 것도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
옆집 애는 이런 저런 학원도 보내는데 우리 애는 왜?
저 친구는 왜 나보다 더 멋있을까? 등등.
이웃과 비교를 하면서 죄에 빠지기 쉬운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비교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나으면 자연히 교만해집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못하면 곧 열등의식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질투하게 되고
결국은 서로 갈라져서 용서하지 못할 미움과 증오 속에서
묶여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는 우리 인간의 보상적 논리를 초월하고
우리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내리는 무상의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위의 누구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 이웃과 비교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당당하고 주체적 신앙인이요,
하느님께서 거저 내리시는 은총의 선물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의 먹구름이 아무리 짙게 드리워 있어도
그 위엔 밝은 태양이 존재함을 알 수 있듯이
이 세상이 아무리 혼탁하고 한 맺힐 일만 생긴다 해도
언제나 그 뒤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우리 신앙은 더욱 튼튼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