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의 선생인 랍비들은
“사람은 잘못한 이웃을 세 번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문제를 끄집어내어
자신 넘치는 기분으로 셋의 배가 넘는 일곱 번까지 용서한다면
충분하리라고 말합니다.
아마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칭찬을 들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일러주십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잘못한 이웃을 용서함에 있어 한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용서라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용서의 기쁨을 누리는 분들도 있지만
잘못한 이웃은 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용서의 행위는
늘 자신에게 어려운 일로 다가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잘못한 이웃을 한없이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실천하기 어려운 부담으로만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살아가면서 힘들고 지치게 되는
크고 작은 많은 불행을 껴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행의 원인을 찾아보면
대부분 이웃과의 잘못되고 비틀어진 관계 또는
자신과의 비틀어진 관계 즉 자신을 용서못하는 것들에서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비틀어진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회복이 바로 용서라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없이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실천하기 어려운 의무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행복이라는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이러한 격려가 단순히 격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실천하지도 못할 것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즉 그것을 실천할 힘도 주시겠다는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서 그 결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격려와 약속이라는 두 가지를 늘 기억하고
마음속에 새겨두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