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이 안식일이어도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면 서슴지 않으시고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눈엣가시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서 단순한 불평과 불만으로 끝나지 않고,
일을 확대시켜 논쟁과 논란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논쟁과 논란의 특징은 소란스러움입니다.
물론 참된 발전을 위해서는 소란스러움이 늘 동반되지만,
그것이 참된 발전이 되려면 소란스러움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의견 충돌도 겪고,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을 때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느끼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외적으로 내적으로 소란스러움을 겪게 됩니다.
이 소란스러움은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고,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마저 무너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길은 소란스럽지 않고
고요히 나아가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모습이 빌라도와의 대화에서 볼 수 있는 침묵입니다.
침묵은 비겁함으로 드러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침묵은 그 어떤 훌륭한 연설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를 죽이려는 모함과 위협 속에서 당당히 올바름의 길을 가려 할 때,
억울함과 실망감으로 고요가 파괴될 때가 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대하고 싶으나, 내적인 에너지가 부족할 때
선이 아닌 악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하느님의 영만이 고요를 지키게 해주고, 깨어진 고요함을 되살려 줍니다.
올바름은 고요함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영적인 보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