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박철현 posted Jan 1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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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잠시 눈발이 날렸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눈을 보는 일이 참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눈에 대해서는 여전히 환상 같은 것이 남아 있나 봅니다.

전방에서 군 생활을 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눈이라면 지긋지긋하다는데도 저는 여전히 눈이 신비롭습니다.

물론 젊었을 때 가졌던 그런 아름다움은 이미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가끔씩 눈을 보면 마음이 포근해지곤 합니다.

아무튼 눈이 내리기는 했지만 쌓이지는 못하고 곧 녹아내렸습니다.

여기는 도시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래도 아직 흔적을 남기고 있을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는 가끔씩 눈을 보는 일이 있었습니다.

눈 때문에 사고를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부르크는 오스트리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도

제대로 된 눈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예전에 노르웨이를 갔을 때는 제법 많이 쌓인 눈을 볼 수 있었으니

나름대로는 호강한 셈입니다.

아무튼 비보다는 눈이 훨씬 더 운치가 있습니다.

러브스토리라는 영화 이후에는 연인들에게 특히 의미 있는 눈입니다.

요즘에는 사랑에 관한 영화나 드라마가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저에게는 사랑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연인들의 사랑, 애틋하고 아름다운 그 사랑은

무감각해지고 마음이 무뎌져 가는 저에게는 그저 축원해주는 사랑일 뿐이고

사랑이라는 말 대신 헌신이나 봉사라는 개념이 좀 더 친근해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심장의 박동소리가 서서히 느려지는 때라서 그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요즘에는 좀처럼 마음을 자극하는 일이 그다지 없습니다.

분명 마음이 무뎌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현상을 보고서도 그 즉시 마음이 움직이기보다는

일단 머리로 먼저 생각하는 버릇까지 생겼습니다.

어쩌면 이게 나이가 들어간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닐는지요?

생각해보니 어느 새 사제로 서품된 지도 20년을 넘겼습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나이만 들어갑니다.

햇병아리 신부에서 중견의 신부가 되었지만

삶의 흔적을 보면 여전히 뚜렷하게 새겨놓은 것이 없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누구나 다 훌륭한 성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저는 그럴만한 그릇이 되지 않는다는 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지금에 더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늘은 눈이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