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by 박철현 posted Jan 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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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리 부자는 아닙니다.

어머니는 아직도 집 한 채 없다는 게 속상하다는 말씀을 가끔 하십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집 한 채 사 드릴 형편도 되지 못합니다.

그저 빚 없이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부자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경제적인 문제로 걱정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정말 필요로 할 때면 어느 때이든지 채워집니다.

그런 마음자세로 사니 불편한 게 없습니다.

많은 신자분들이 신부님이 너무 돈을 많이 쓰는 거 아니냐고 걱정을 합니다.

한 평생 아끼고 사는 일에 익숙해진 분들이니

신부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돈을 쓰는 일이

안쓰러워 보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쓸 수 있기 때문에 쓰는 것이고,

정말 힘들어지면

솔직하게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어떤 신부님들이

돈을 많이 낼 수 있는 신자분들과 좀 더 친하게 지내는 걸 보고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성당재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신부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자분들과 식사를 하러 갈 때도

신자분들 한 번, 그리고 저 한 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예 식사초대를 받지 않았던 적도 있습니다.

여기 독일에서는 각자 자신이 먹은 것을 계산하는 게 일상사이지만

저는 아직 그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제가 초대를 하는 일이 더 많은 편입니다.

아직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는 큰돈을 모으려고 함부르크로 온 것도 아니고

그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저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나름대로는 할 수 있는 부분을 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요즘에는 기차를 탈 때도 잠시 올라와서 돈을 구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3년 전에는 그런 분들은 없었던 것 같은데

상황이 더 안 좋아진 것인지 가끔씩 그런 분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에게는 개인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에게까지는 자비가 없는 모양입니다.

사회복지시설에 있다 보니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개선해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면서

아주 당연하다는 식으로 사는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스스로 노력하는 분들은 기꺼이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걸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왜, 저렇게 살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구걸을 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보려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저 그렇게 구걸을 해서 술이나 사서 마시는 분들도 있기 때문에

그런 분들에게는 얼마라도 드릴 수 없는 게 저의 마음입니다.

누가 정말 절실한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도움을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건 축복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