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넷째 주일에는 찬양미사를 봉헌합니다.
미사 후에는 찬양미사에 전례봉사를 하신 분들을 작은 아가페에 초대합니다.
처음에는 참여하시는 분들이 많더니
요즘에는 점점 더 참여하시는 분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잔칫상은 준비가 되어 있는데 초대 받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약속을 미리 잡아놓았을 수도 있고,
가난한 본당신부 주머니를 털게 되어 미안한 마음 때문에
오지 않으시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입장에서 볼 때는 조금 서운한 측면도 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데
사람들이 저의 호의를 거부하는 모습이 되니까요.
어쩌면 그 자리가 불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시간들을 이용해서 찬양미사에 대한 의견도 듣고,
오늘은 어떤 부분이 특별히 좋았다든가 하는
피드백도 들을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제가 주머니를 조금 털더라도 결코 아깝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신자분들의 생각은 다른 가 봅니다.
확실히 저의 마음과 신자분들의 마음은 차이가 납니다.
그런 부분 때문에 차이라는 게 생겨나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솔직히 신자분들이 부담스러워 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실 신자분들은
신부에게 무언가를 해드리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부가 무언가를 해준다고 하면
부담스러움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자리가 마련되면
그것을 즐길 줄 아는 것도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본당신부를 할 때도 그랬습니다.
어느 정도 삶의 기반을 닦아놓으신 분들을 만나면 제가 주로 얻어먹었지만,
청년들이나 주일학교 선생님들을 위해서는
언제나 제 호주머니를 열었습니다.
물론 청년들 중에는 직장을 다니고 있는 친구도 있었고,
수익이 오히려 저보다 훨씬 나은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 선생님들도 빠듯하게 생활하는 분들보다는
그래도 좀 여유가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호주머니가 허락하는 한 제가 계산을 했던 건
이것 역시 하나의 투자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이 이렇게라도 신앙의 끈을 이어가면
나중에 좀 더 여유가 있게 될 때 더욱 값진 나눔을 실천할 수도 있을 테고,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경우에는,
미래의 신앙인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분들이니
그 정도는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찬양미사 후의 아가페도 그런 측면에서 저는 신자분들을 초대하는 것인데
그걸 누리지 못하시는 건
어쩌면 본당신부를 너무 배려하시거나
아니면 마음적인 여유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닐까 싶습니다.
부디 누릴 수 있을 때는 누릴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